직함보다 오래 남는 ‘사람의 공정’에 대하여
회사에 다니다 보면, 이맘때쯤 조직의 공기가 달라진다.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복도에서 스치는 기류만으로
‘인사 시즌’이 왔다는 걸 모두가 안다.
누군가는 올라가고,
누군가는 조용히 짐을 싼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느낀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타인의 승진과 퇴사는
내 인생의 직접적인 손익과는 거리가 있는데,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할까?
어째서 이 시기만 되면
다들 숨을 조금 더 얕게 쉬게 되는 걸까?
나는 오랫동안
그 이유가 ‘경쟁심’이나 ‘불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쌓이자,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됐다.
조직의 인사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는 구조 위에서
매년 되풀이되는 작은 졸업식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졸업식의 순서가 언제 나에게 올지 알 수 없다.
이 불확실성이 우리를 민감하게 만든다.
더 냉정한 이유도 있다.
인사는 개인의 잘못도, 실수도 아니다.
회사의 전략, 산업의 사이클, 시장의 변화…
너무 큰 힘들이 이미 방향을 정해놓는다.
엔지니어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는 거대한 플라스마(Plasma) 한가운데
부유하는 라디칼(Radical)과 같다.
라디칼 하나가
“나는 내 길을 가겠다”라고
거대한 챔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해 식각(Etch)을 하고 반응하지만
그 위에서 움직이는 구조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사 발표가 나면
‘능력’보다 ‘구조’를 떠올리고,
‘실력’보다 ‘운’을 생각한다.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인간의 마음이 예민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요즘
조금 다른 관점을 갖게 됐다.
중요한 건 조직에 ‘얼마나 오래’ 남아 있는가가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단단하게’ 머물렀는가이다.
직함은 매해, 인사의 계절에 따라 바뀌고
속도는 타의에 의해 결정되지만,
결국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단 한 가지다.
“저 사람은 어떤 공정(Process)을 남겼는가.”
어떤 온도로 일했는지,
동료들에게 어떤 인간적인 잔상을 남겼는지,
함께 보낸 시간들이 서로에게
잔여물(Residue)이 아닌
긍정적인 패턴으로 새겨졌는지.
이것이 결국 커리어의 결론이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승진과 퇴사는
나에게 비교의 기준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지금 어떤 방향을 향해 걷고 있는가”
를 다시 점검하게 만드는
조용한 신호에 가깝다.
올해도 어김없이 조직의 계절은 바뀌고,
누군가는 새로운 자리에 앉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길을 걷는다.
그 거친 바람 속에서 흩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나의 공정을 들여다본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
경쟁이 아니라 균형,
그리고 직함보다 더 오래 남는 사람의 흔적.
이 소란스러운 인사의 계절 속에서도
나는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내 삶을 공정(Etch)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