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은 AI가, 의미는 사람이

데이터가 읽지 못하는 '맥락의 온도'

by JP 정표

1. 기계는 정확하고, 사람은 미묘하다


반도체 공정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정확함’이다.


나노미터(nm) 단위의 세계에서 수십억 개의 회로를 깎아내는 일.
어떤 공정엔 수 nm의 오차도 치명적이다.


하나의 오차는 수율 0%로 이어진다.
그 한 자리의 숫자가, 수백억—어쩌면 수천억 원의 결과를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이토록 정밀한 일이라면, 언젠가 AI가 사람보다 더 잘할 거야.”


그 말,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물론 AI는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영역에서 수치를 감지하고,
방대한 패턴을 학습해 우리보다 훨씬 정밀한 결과의 도출이 가능하다.


하지만 15년간 차세대 공정개발을 하면서 느낀 것은,
그 ‘정밀함’만으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 감각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이러한 부분까지도 AI가 커버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수백만 개의 데이터가 ‘정답’이라고 외치는 순간에도,
현장의 엔지니어가 느끼는 ‘감’이 그것과 충돌하는 순간이 있다.


30.png (기계는 정확하고, 사람은 미묘하다.)


2. 데이터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

공정 조건을 최적화(Optimization)하다 보면,

수치화된 데이터가 아니라 엔지니어의 '감'으로만 설명되는 구간이 불쑥 나타난다.


“이 공정 조건은 조금 거칠다.”
“이 식각 공정으로는 양산성이 없겠는데.”


그건 데이터가 아니라
현장을 오래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공기의 질감이다.


AI가 이 복합적인 감각을 모방하고 학습하려면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


기계는 정해진 값의 '차이'를 배우지만,

사람은 정해지지 않은 맥락의 온도를 배운다.


33.png (데이터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 엔지니어의 '감')


3. 사람의 손끝이 남긴 흔적


그래서 공정의 마지막 조정은, 종종 엔지니어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그 손끝에는 수많은 실패의 기억이, 성공의 환희가 누적되어 있다.
그것이 그 사람만의 고유한 ‘보정값(Calibration)’을 만든다.


이건 공식이 아니라,
오랜 시간 감정이 누적되어 만들어진 기술이다.


그건 기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간 그 자체다.


AI가 식각의 깊이를 계산할 수는 있어도,
“오늘은 조금만 덜 깎자.”라고 결정하는 건 사람이다.


이 ‘감각’은 비단 기계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사람을 대하는 일, 즉 리더십도 본질은 같다.


AI가 팀원의 표정에서 스트레스 ‘수치’를 읽어낼 순 있어도,
팀 전체의 사기가 ‘무겁다’고 느끼고 커피 한 잔을 건네는 건 리더의 ‘감’이다.


팀의 속도를 조절하고, 분위기를 다듬고,
상황의 균형을 판단하는 일은, 아직은 인간의 몫이다.


32.png (사람의 손끝이 남긴 흔적, 수많은 경험과 감정이 누적된 '손끝의 보정값', 그리고 리더십에서의 '감각'.)


4. 그래서 나는 여전히 ‘손’을 믿는다

AI가 아무리 완벽한 레시피를 제안해도,

나는 내 손끝의 감각을 한 번 더 믿는다.


AI가 식각 조건을 예측하고
수율(Yield)을 99.9%까지 높이는 시대가 와도,


그 마지막 0.1%를 완성하고,
그 공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결국 사람이다.


엔지니어의 일은 손끝으로 세계를 정렬하는 일이라면,
리더의 일은 마음으로 관계를 정렬하는 일이다.


AI가 공정을 완성할지 몰라도,
그 공정의 ‘의미’를 완성하는 건 여전히 우리, 사람이다.


31.png (나는 여전히 ‘손’을 믿는다 - AI 시대에도 '마지막 0.1%'를 완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