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펼치고, 마음을 정리합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 다섯 달이 지났다.
이상하게 ‘집’ 같지 않았다.
짧아서가 아니다.
2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먼 곳이었다.
돌아와 처음 든 감정은
반가움보다 낯섦이었다.
한국 공기 속에 섞인 속도와 무게.
몸과 마음이 아직 거기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짐 없이 시작한 한국 생활.
박스 수백 개가 한꺼번에 도착하던 날,
거실은 작은 전쟁터 같았다.
그전에 다행히 장인·장모님 댁이 비어 있어
한 달 정도 머물 수 있었다.
따뜻했고, 익숙했고, 그래서 더 아팠다.
한국에 돌아오니,
가족의 시간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함께하지 못한 날들이
조용히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오랜만에 부모님을 마주하며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그 순간,
우리의 지난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렀는지 알 수 있었다.
해외 주재라는 것은
남들이 보기엔 반짝이지만,
그 반짝임 뒤에서
가족의 시간이 조용히 깎여 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HBM 공정 개발.
한국에서 지금 가장 뜨겁고, 가장 빠른 곳.
야근은 다시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졌다.
주말에도 종종 나간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지금은 책임지는 자리라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이번엔,
속도가 나를 삼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벨기에에서는 글을 쓰지 못했다.
자서전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만 있었지,
막상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그저 휴대폰 속 사진만 묵묵히 시간을 쌓고 있었다.
귀국을 앞두고 다짐했다.
그 기억들을 그냥 지나가게 두지 않겠다고.
추석 연휴에 사진을 펼치고
조용히 문장을 꺼냈다.
첫 문장은 어색했지만
두 번째 문장부터는 멈출 수 없었다.
전자책을 만들었고,
블로그를 열었고,
인스타를 시작했고,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벨기에의 2년보다
한국의 한 달이 내 삶을 더 바꿔놓았다.
물맛도 바뀌었다.
한국에서 에비앙이 고급 물인 줄 알았다.
유럽에 가서 알았다.
그건 석회수였다.
그곳에서 좋은 물은 SPA 같은 미네랄워터였다.
지금은 에비앙보다 아리수가 더 좋다.
정수기 물, 얼음, 부드러운 물맛.
작은 것 같지만
삶을 다시 붙잡아주는 감각이다.
요즘 한국은 가을이다.
단풍이 이렇게 곱고 뜨거운 계절이었나.
벨기에 숲도 아름다웠지만,
한국의 가을은 결이 다르다.
선명하다. 살아 있다.
그리고 어딘가, 사람 마음을 단단하게 만든다.
가끔 폴더를 열어
사진을 정리한다.
이름 붙이고, 다시 보고,
그 시간들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그 과정이
나를 다시 나로 만든다.
돌아왔지만, 아직 돌아오는 중이다.
그래도 괜찮다.
빠르게 가 아니라, 내 속도로.
기록하는 사람으로.
다시 살아가는 사람으로.
속도에 삼켜지지 않기로 한
나만의 방식이다.
-JP 정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