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깎여나가지 않는 법

반도체 엔지니어가 바라본 AI 에이전트와 생존의 패턴

by JP 정표

나는 15년 차 반도체 엔지니어다.
나의 주 전공은 Etch(식각), 쉽게 말해 ‘깎아내는 일’이다.


웨이퍼 위에 회로를 새기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막질을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한다.
플라스마라는 강력한 에너지를 때려 부어,
남겨야 할 패턴만 남기고 나머지를 날려버리는 것.


그것이 내가 매일 연구소에서 마주하는 공정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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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정말로 거대한 플라스마다


최근 한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실리콘밸리 Arize AI 아시아태평양 총괄의 이승민 님의 대화였는데,
그는 AI가 이제 단순한 챗봇을 넘어
스스로 계획하고 행동하는 ‘에이전트(Agent)’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변화가 우리 사회의 불필요한 일자리들을
아주 빠르게, 아주 강력하게 깎아낼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AI는 정말로 플라스마와 닮아 있었다.


플라스마는 그저 빛나는 기체가 아니다.
반응성이 극도로 높은,
보호막이 없는 모든 것을 산화시키고 증발시키는 에너지다.
AI 에이전트가 가져올 미래가 딱 그렇다.


단순히 스펙을 쌓아 취업하고,
시키는 일만 성실히 처리하며,
조직의 톱니바퀴로 존재했던 ‘중량 문화(Heavyweight Culture)’ 속 개인들은
AI라는 플라스마 앞에서 너무도 쉽게 식각(Etch)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친 공정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무엇일까?


반도체에서는 패턴(Pattern)이 있는 부분만 살아남는다.
포토레지스트(감광액)라는 보호막이 단단히 덮여 있는 영역만이
플라스마로부터 깎여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이 깎여나갈수록
그 패턴의 존재감은 더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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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속에서 이승민 님은
그 보호막의 정체를 ‘호기심’‘고유성’이라고 말했다.


남들이 정해준 정답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 호기심.
그리고 암스테르담의 자전거 가이드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기술을 결합해
대체 불가능한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




무거운 질량 속에서 생각한 것들


국내 제조업 기반의 기술 조직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나에게
이 메시지는 유난히 깊게 스며들었다.


우리는 여전히 실패를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
‘무거운 방식’의 일 문화 속에 있다.
계획하고, 보고하고, 검증하느라
때로는 가장 중요한 타이밍을 놓치곤 한다.


반면 실리콘밸리의 ‘경량 문화’는
실패를 자산 삼아 훨씬 빠르게 움직인다.


이제 엔지니어인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질문해 본다.


나는 조직이라는 보호막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가?

내 명함을 떼고 나면, AI가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CD(Critical Dimension, 선폭)는 무엇인가?




미국 1년, 벨기에 2년이 가르쳐 준 것


미국에서 보낸 1년,

그리고 벨기에에서 보낸 2년.
그곳에서 내가 찾은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낯선 문화에 던지는 질문,
그리고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엔지니어로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최근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 유럽에 가면 저녁이 있습니까?>를 쓴 것도
결국은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나답게 만드는 패턴이며,
AI라는 강력한 식각 가스로부터
나를 지켜줄 Passivation Layer(보호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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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의 아빠로서의 다짐


두 딸을 키우는 아빠로서
또 하나의 다짐이 생겼다.


아이들에게 정답을 맞히는 법을 가르치기보다,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다.
호기심이라는 단단한 막질을 입혀주고 싶다.


그래야 훗날 AI라는 플라스마가 몰아쳐도
아이들은 깎여나가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회로를
세상에 선명하게 새길 수 있을 테니.




Etch the Life.

삶은 결국
불필요한 것을 깎아내고
본질을 남기는 공정이다.


AI 시대는 그 공정을 조금 더 빠르게 만들 뿐이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점검해야 한다.


나의 패턴은 선명한가?
나의 호기심은 살아 있는가?


그 두 가지가 확실하다면
깎여나가는 것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군더더기가 사라진 자리에
진짜 ‘나’만이 남을 테니까.


나나.png 아이슬란드에서 찍은 사진, '그래서, 유럽에 가면 저녁이 있습니까'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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