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페이스의 끝은 완주가 아니라 ‘재작업’이다

반도체 도시 에인트호번에서 배운 속도의 본질

by JP 정표

요즘 SNS를 켜면 온통 달리는 사람들이다.
형광색 띠를 두르고 한강을 달리는 얼굴들을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다들 무엇이 그리 급해서, 혹은 무엇을 얻고 싶어서 저렇게 치열할까.


사실 작년 가을, 나도 그 대열에 섞여 있었다.

전 세계 유일의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가 태어나는 곳,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ASML 마라톤.


해외 파견이 몇 개월 남지 않았던 때였고,

돌아갈 자리와 다음 장면을 생각하면 마음이 자꾸만 보폭을 넓히던 시기였다.


종목은 10.55km, 쿼터 마라톤.

풀코스 러너들에겐 웃을 거리일지 몰라도,

달리기와 거리가 먼 내겐 에베레스트 같았다.


초반 3km는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추월하는 재미까지 붙자, 속도가 마음을 끌고 갔다.


문제는 7km였다.
다리가 갑자기 쇳덩이처럼 무거워지고, 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때 알았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오버페이스구나.


그래서 속도를 버리고 리듬을 찾았다.

걷다가 다시 뛰고, 숨 고르고, 잠깐 멈췄다가 다시 나아가고.

기록은 별거 없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조금 조용해지더라.



목에 걸린 10.55km 메달이 그날의 유일한 데이터였다.

기록은 남지 않았는데, 교훈은 남더라.


일도 별반 다르지 않더라.

속도 욕심에 정밀도를 놓치면,

결국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재작업(Rework)이 따라온다.


엔지니어에게 재작업이란 단순히 다시 하는 게 아니다.
이미 투입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고,

전체 공정의 수율(Yield)을 망가뜨리는 뼈아픈 실수다.

초반의 과속이 전체의 리듬을 망가뜨리는 일.


수천억 원짜리의 장비를 만드는 도시 한복판에서,
나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다시 배웠다.


“속도보다 더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신뢰성(Reliability)이구나.”


12월 달력을 바라보며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올해의 나는, 오버페이스 없이 나만의 리듬을 지키며 달려왔을까.


우리 모두 각자의 트랙에서, 큰 부상 없이 여기까지 왔기를 바라며.

그거면 됐다고, 오늘은 그렇게 말하고 싶다.


— JP 정표, Etch the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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