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보폭

[디스로케이션] 오늘은 어디가 조금 삐끗했을까

by JP 정표

열심히 걷고 있는데도
한 걸음이 한 걸음 같지 않고,
어제의 리듬이 오늘은 잘 맞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딱히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을 계단 한 칸이 유난히 높게 느껴지고,
익숙한 길이 잠깐 낯설게 느껴질 때요.


그럴 때 저는 발끝이 아니라

마음부터 먼저 살핍니다.
“오늘은 어디가 조금 삐끗했을까.”




오늘의 전시 작품

작품명: 어긋남이 만든 풍경 (Landscape of an Errant Stride)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으로 그려진 4x5 유화.

수직으로 곧게 뻗은 사이프러스 나무들 사이에서

홀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띕니다.

정렬된 규격에서 벗어난 이 나무 덕분에

숲의 풍경은 전형성을 탈피하여 생동감을 얻습니다.


어긋남이 만든 풍경 (Landscape of a Leaning Stride)


[도슨트 JP의 한마디]

남들과 보폭이 어긋난 덕분에

부러지지 않고 유연하게, 나만의 길을 찾게 되는 순간을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규격에서 벗어난 결함이,

역설적으로 가장 독창적인 풍경을 완성하는 주인공이 되기도 하니까요.




결정(Crystal) 구조를 가진 실리콘 웨이퍼 안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습니다.
수조 개의 원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정렬되어
자리를 지키는 것이죠.


그 규칙이 아주 조금만 어긋나도
결은 달라집니다.


반도체에서는 이런 어긋남을
디스로케이션(Dislocation)이라고 부릅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내부 배열한 줄이 살짝 비틀린 상태입니다.


겉보기엔 같은 결정처럼 보여도
이 어긋남 때문에 내부에 응력(Stress)이 쌓입니다.
흐름이 막히고,
어떤 구간은 아주 작은 충격에도 더 쉽게 흔들리기도 하죠.


이 단어가 어느 날부터는
사람에게도 있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 삶에도 디스로케이션이 생기니까요.




삶의 어긋남은 대개
엄청난 사건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작은 일정 변경,
부족한 잠,
자꾸 미뤄지는 대화 같은 것들이
마음 안에 보이지 않는 비틀린 줄을 하나 만들고,
조금씩 방향을 틀어놓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응력은
조금 무섭습니다.


괜찮은 척은 할 수 있는데,
조금만 건드리면 예상보다 크게 흔들릴 때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날카로운 흔들림은 대개
내가 아니라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에게 먼저 닿곤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긋난 보폭을 느끼는 날이면
일단 걸음을 줄여 봅니다.


정답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더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요.


대신 아주 작은 질문 하나만 남겨 봅니다.


“지금 내 안에서 어떤 줄이 살짝 비틀렸을까.”
“오늘은 무엇을 좀 덜 해도 괜찮을까.”


어쩌면 삶은
완벽한 정렬을 유지하는 일이라기보다
어긋남을 알아차리고
조금씩 다시 맞춰보는 일에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저는
크게 무너지지 않기 위해
제 보폭을 가만히 확인해 봅니다.




여러분도 요즘
평소와는 다른 보폭으로 걷고 계신가요?


안쪽에서 리듬이 어긋나는 느낌이 들 때,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정렬’을 찾아가시나요?


— JP 정표 | JP Etch 미술관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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