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둔 마음을, 오늘은 빛 아래 올려봅니다
어릴 적, 시험을 망친 날이면
성적표를 가방 깊숙한 곳에 쑤셔 넣곤 했습니다.
틀린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는 게 무서웠거든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어디서 실수했는지 확인하는 일은
부족함을 그대로 남기는 것 같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비슷했습니다.
실패한 프로젝트의 보고서를 다시 읽는 일,
어긋나 버린 관계의 대화를 복기하는 일.
‘잘못된 결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생각보다 큰 에너지가 필요하더군요.
그래서 덮어두곤 했습니다.
그런데 덮어둔 일들은
사라지기보다 안쪽에서 조용히 남아 있었습니다.
작품명: 빛 아래의 해부 (Anatomy Under the Light)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을 오마주한 4x5 유화.
어두운 연구실 안, 황금빛 현미경 위로
강렬한 한 줄기 빛이 쏟아집니다.
그 빛은 실패의 원인을 정교하게 기록한 낡은 수첩과 칩의 단면을 비추며,
외면하고 싶었던 어둠 속의 진실을 향해 예리하게 파고듭니다.
고장 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때로
가장 아픈 곳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반도체에서는 그 일을 ‘불량 분석(FA)’이라고 부르지요.
삶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있습니다.
덮어두었던 기록을 다시 펼치는 일,
마음의 단면을 아주 천천히 확인하는 일.
그 과정은 여전히 아프지만,
적어도 같은 자리에서 계속 멈춰 서게 하지는 않더군요.
오늘은 그 ‘빛 아래에 올려두는 용기’를 함께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반도체 공정에서
가장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 있습니다.
불량 분석(FA, Failure Analysis)입니다.
불량이 나면
우리는 멈춘 칩을 현미경 아래에 올립니다.
때로는 단면을 열어
보이지 않던 내부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왜 여기서 멈췄는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가.
다음을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FA는 누군가를 탓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아픈 기록’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시간에 더 가깝습니다.
그 과감함이 있어야
원인이 겨우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니까요.
요즘은 저도 가끔
제 마음을 현미경 위에 올려봅니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 일이 꼬일 때,
누군가와 어긋났을 때
서둘러 덮어버리기보다
조금 늦춰서요.
“내 자존심이 어디서 긁혔을까.”
“내가 놓친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질문들은 늘 답을 주진 않지만,
적어도
제가 어디에서 멈춰 섰는지
한 번쯤은 보여주더군요.
혹시 여러분에게도
가방 깊숙이 넣어둔 ‘성적표’ 같은 기록이 있으신가요?
저는 가끔, 그걸 꺼내 보는 쪽을 선택해 보려고 합니다.
— JP 정표 | JP Etch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