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스치는 향기에 어렴풋이 예전 기억이 나는 것처럼, 우연히 흘려오는 옛 노래에 불현듯 떠오르는 빛 바란 추억처럼, 정확히 언제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가끔 특정 향기나 노래소리가 켜켜히 숨겨놨던 묵은 추억들을 한번씩 비추면서 괜스레 마음이 울컥하고 뭉클해지곤 한다. 이게 슬픈 마음인지 그리운 마음인지 즐거운 마음인지 행복한 마음인지 역시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과거에 대한 '아련함'이라고 해야 할까. 아련하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어렵지만 그리움보다는 좀 더 강하지만, 슬프지는 않은 그런 감정인 것 같다.
나에게 첫 나가노 여행은 '아련한' 감정을 자아내는 공간이자 추억이다. 2017년 새해를 맞이하여 훌쩍 혼자 떠났던 장소. 1월 1일에 시작하는 여행이었던 만큼 의미 있는 특별한 공간에 가고 싶었다. 단순히 유명한 관광지를 보러 가기보단 남들이 잘 모르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그런 공간을 찾고 싶었다. 나가노에 위치한 지고쿠다니는 산 속 깊은 곳에 원숭이들이 온천을 하는 곳이다. 뭔가 전래동화 속에 나올 법한 공간이었기에, 새롭게 시작하는 새해를 그 당시 마지막일지도 몰랐던 일본에서의 한 해를 정말 후회없이 보내자는 각오를 다잡고자 선택한 장소였다.
1월 1일을 알리는 자정이 지나고 신주쿠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설레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도쿄에서나가노는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도착하니 아직도 어두컴컴한 새벽 네시쯤이었다. 여자 혼자 새벽 거리 역 근처를 배회하는 것은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날은 새해 첫 날이라며 여기저기 술취한 학생들, 아저씨들이 비틀거리며 서로 좋다고 소리지르고 날뛰어다니는 장면을 심심치 읺게 볼 수 있었다. 지고쿠다니를 가기 위해서는 나가노역에서 지하철을 타야했고 첫 차까지 약 1시간 남짓 기다려야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지고쿠다니 입구에 도착했다. 이 여정도 충분히 지칠법한데 입구에서 목적지까지는 약 한시간 반을 굽이굽이 펼쳐진 산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눈이 소폭히 쌓인 산길을 혼자 걸으며, 노래도 부르고 혼잣말도 중얼거리고, 스스로에게 응원도 하며 그렇게 한시간 반 남짓 걸었던 것 같다. 온천 특유의 쿱쿱한유황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할 즈음 지고쿠다니에 거의 다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8시 입장이었고 다행히 입장시간에 맞춰 첫번째 손님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이 날은 뭔가 작은 것들도 의미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새해 첫 날이기도 했고 30살이 되는 첫 날이기도 했으며 일본에서 있는 마지막 해의 첫 날이었기도 했으니.
난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은 강아지도 무섭다. 가만히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들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언제든 나에게 달려오는 상태일 때는 너무너무 무섭다. 예전에 강아지카페 갔다가 정말 그자리에서 오줌을 지릴 뻔 했다..
그런 내가 크고 작은 원숭이들 약 백여마리가 너무나 자유롭게 날뛰는 그런 공간에 발을 디뎠다. 먼저 원숭이 숫자에 놀랐고, 그런 자유로운 공간에 안내직원 통제나 통솔이 없다는 것에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원숭이들이 사람을 공격한다거나 사람에게 달라붙는다거나 하는 모습이 다행히 보이지 않아 또 놀랐다.
어미원숭이 새끼원숭이 대왕원숭이할 것 없이 정말 많은 원숭이들은 그들 나름의 규칙과 룰로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하고 있는 듯 보였다. 대왕으로 보이는 원숭이 주변에는 마치 아부라도 하듯 여러 원숭이가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주먹만큼 작은 새끼원숭이는 어미원숭이 등에 올라타 편안하게 쉼을 청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원숭이들이 첫 입욕을 시작하기까지 꽤 기다려야 했다. 그것도 마치 그들의 룰 중에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침 식사를 끝낸 원숭이들은 마치 소화라도 하듯 온천 주변을 맴돌다 뒤이어 대왕처럼 보이는 원숭이 한마리가 온천에 몸을 담구니 그 뒤를 이어 여럿 원숭이들이 온천을 시작하였다. 원숭이들이 온천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30분이면 충분했다. 지고쿠다니 이후에 일정이 없던 나는 거의 두세시간을 지고쿠다니에 머물렀던 것 같다. 더이상 그들의 모습이 신기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나가노는 겨울 스키장으로 유명하다. 동계올림픽이 치뤄졌던 적도 있던 만큼 나가노의 겨울은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나가노가 좋았던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눈 덮힌 설산의 장관이 시선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시부온센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다소 지쳐 우연히 뒤를 돌아봤을 때 저 멀리 보였던 키타알프스의 아름다운 장관이 신비롭다 못해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판타지적인 느낌마져 자아냈다. 눈에 덮힌 높고 높은 산맥이 이루는 장관은 한 폭의 그림처럼 사진으로는 담기 힘든 그런 광경을 선물하며 나를 감격시켰다.
이후 일정이 없던 나는 호스텔에 들어와 그 다음 일정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마을이 바로 '오부세'였다. '밤'이 유명해 일본에서 인기있는 디저트 중 하나인 '몽블랑'이 특산물 중 하나인 오부세는 일본에서 가장 작은 도시로 유명하다고 했다. 몽블랑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일본에서 가장 작은 마을'이라는 동화같은 표현에 그 다음 목적지로 오부세를 바로 정했고, 그 선택은 역시 탁월했다. 아침 일찍 작은 전차에 몸을 싣고 오부세로 향했다. 새해라 그런가 관광객 없이 한적한 마을이었지만 아기자기한 마을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몽블랑처럼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나는 오부세에 있는 사케 양조장을 아침 아홉시에 방문했다. 와인이든 맥주든 사케든 여행할 때마다 꼭 브루어리를 하는 편이다. 사실 사케 양조장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아침 빈 속에 맛보는 사케의 향연은 나쁘지 않았다. 아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음을 청했다. 가지각색의 사케를 한모금씩 맛보는 셋트를 주문하였고 속을 달래줄 오쯔마미가 있을 거라 기대했으나, 오쯔마미는 이게 웬걸, 소금이었다. 하지만 그것 자체도 좋았다. 사케는 부드럽고 향긋했으며 한 모금 음미한 후 찌르르 뱃 속으로 들어와 내 온몸을 뜨뜻하게 데워주었다. 향이 깊은 소금까지 손바닥에 찍어 먹다보니, 사케의 그 단맛이 더 강하게 느껴졌는데, 그러다보니 어느새 여섯잔의 사케를 30분만에 다 마셔버렸던 듯 하다. 알딸딸해진 기분으로 기분좋게 취한 나는 아침 열시에 양조장에서 나와 본격적으로 오부세 마을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한적한 거리 안 쪽을 들어가 보니 새해라고 몇몇 마을 분들이 떡을 만들고 있었다. 절구통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찧는 그 모습은 정말 가장 작은 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동화와도 같은 한 장면이었다. 그런 장면장면들이 지금도 '아련한 추억'으로 내 마음속에 깊이 남겨진 듯 하다. 마을 분들이 만든 떡을 공짜로 얻어 먹으며, 거기에 덤으로 달달한 아마자케까지 마시니 일본에서 제대로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소박한 행복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오부세에서 달콤한 시간을 보낸 후 나가노에서 다시 야간 버스를 타고 도쿄로 돌아왔다. 마지막 일본 생활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2017년은 내 예상과는 다르게 조금 더 길어져 2021년인 지금도 도쿄에 있지만, 그 사이 꽤 많은 소도시 여행을 다니고 일본 전국을 다녀봤지만, 2017년 새해를 보낸 나가노에서의 여행이 가장 인상 깊고 가슴 깊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살고 싶다고 다짐했던 내 마음이 곁들어져 더욱 인상깊은 공간으로 기억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