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셋, 현재의 기록
에세이 - 혼자. 와인 그리고 재즈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시큼 텁텁한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고 느릿한 멜로디에 빗소리까지 어우러진 재즈 선율을 음미하며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고 있다.
마음 한 구석에 오늘은 브런치에 글을 써야지 하다가도 막상 그 첫 줄을 떼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에 소재가 고갈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많은 소재들 중 어떤 이야기를 택해야 할지, 그걸 어떤 식으로 좀 더 있어 보이게 표현할지 욕심과 고민에 결국 백지상태로 마무리한 날이 대부분이었다. 해외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기도 하고 이곳저곳 인상 깊게 남아있던 일본 소도시 여행지를 기록하고 싶기도 했고 MBA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좀 더 자세히 풀어보고 싶기도 했고 곧 10년 차 직장인으로 지금까지 느껴왔던 다양한 감정들과 마음의 새기고 싶은 것들을 되새김질하고 싶기도 했다. 아, 다이내믹했던 연애스토리도 다시금 추억해 보고 싶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첫 줄을 떼기가 더더욱 힘들었던 것 같다. 과거의 일들을 곱씹으며 떠올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마저도 완벽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었던 무모한 욕심 때문에 결국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희미하게 흐려져 간 소재들이 너무 많다. 아쉬움은 뒤로하고 이제는 마음 가는 대로 일단 써보기로 했다. 그리고 하나 더 다짐했다. 자꾸 과거를 추억하지 말자고. 지금 현재 내가 느끼는 이 감정에 충실하자고. 지금 나의 감정에 좀 더 집중하자고. 그리고 이를 온전히 기록하고 싶어졌다. 이 시간도 언젠가는 되새겨보고 싶은 과거의 추억이 될 테니까 말이다.
요즘에 나는 반짝반짝한 기운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서른 중반에 접어들면 다들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싶기도 하지만 요새 나는 나에게 참 불만이 많다. 그다지 특별함 없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단조로움이 이제 익숙할 때도 됐는데 나는 늘 새롭고 설레고 싶은가 보다. 하루 이틀 느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작년부터 반복된 일상이 주는 지루함이 자꾸 나를 나태하게 만든다. 새로운 취미를 갖는 것도 귀찮고, 사람을 만나는 것은 더더욱 귀찮아졌고 그러다 보니 익숙한 환경에 익숙하게 만나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고 있는 요즘이다. 해외생활이 길어지면서 (벌써 6년 차...) 어쩔 수 없이 인간관계의 폭이 확 좁아진 것도 있지만 코로나 때문에 또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을 자주 만나지 못한 것도 한 몫한 것 같고, 거기다 나이도 나이인지라 이제는 친구보다 챙겨야 할 가족들이 먼저인 지인들이 꽤 많이 생겨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싸력을 바탕으로 위기를 기회로, 사회활동을 활달히 하는 친구들도 있기 마련이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성격은 아닌 것 같다. 새로운 모임에 나가 또 진부한 자기소개를 늘어놓고 관심도 없는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며 웃어줄 만큼의 에너지도 없을뿐더러 시끌벅적 한 그 혈기 넘치는 분위기에 압도당해 금방 피곤해질 것 같은 그런 내 모습 마주하는 것도 자신이 없다. 고작 (만) 서른셋에 불과한데 훌쩍 늙어버린 기분이다. 자꾸 20대의 꿈 많고 욕심 많고 도전하던 반짝거렸던 과거의 내가 참 많이 그립다.
지금도 새롭게 시작하기에 늦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나서지 못하는 건 용기가 부족하거나, 다른 의미로 욕심이 많거나.. 자꾸 갈팡질팡 하는 내 모습을 계속 마주할 때마다 침울해지지만 늘 결론은 기다리자, 잘 모르겠다로 귀결된다. 주체적으로 내가 내 미래를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누군가의 힘을 바라고 있다. 내가 내 의지로 직접 먼저 결정하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 용기가 필요한 것인진 모르겠지만 제삼자의 강요든 설득이든 어쨌든 나 아닌 타인에 의해 내 미래가 결정되기를 무의식 중에 바라왔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꾸 상황 탓을 하며 정작 내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아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다시 반짝거리고 싶다. 무모한 도전 말고 이제는 좀 더 정제된 나의 열망을 깊게 탐구해보고 용기 있게 추진해 보고 싶다. 모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근자감 말고, 젊었던 패기에 나 스스로를 너무 믿었던 어찌 보면 오만한 꿈들은 좀 내려두고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의 한계를 명확히 바라보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지를 찾아, 그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고 싶다. 그래 나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대단한 사람 말고, 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