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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 온천마을에서의 하루- 아키타

아키타 츠루노유온센

by 요니

어릴 때 동화 쓰는 것이 재밌었다. 동화를 쓰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내 상상 속 공간에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것들이 펼쳐지기 때문이었다. 내 동화 속에서는 작고 아늑한 오두막집이 자주 등장했다. 오두막 집 한편에 놓인 벽난로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모닥불을 쬐며 노곤노곤 몸을 녹이며 따뜻한 홍차를 마시는 주인공의 행복한 이야기를 써 내려갈 때면 언제나 나도 실제 그런 공간에 가 보고 싶다고 바랬던 것 같다. 숲 속 한가운데 싱그러운 풀내음을 맡으며 그렇게 평화롭고 여유롭게 진정한 '쉼'을 만끽하고 싶었다. 어딘가에 있을 법하지만 찾기 어려운 내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그런 공간 속에서.


그 꿈이 일본 소도시 첫 여행에서 이루어졌다. 서른이 되기 딱 반년 전, 처음 나 홀로 여행의 목적지는 아키타에 있는 츠루노유 온센이었다. 츠루노유 온센은 몇 년 전 방영했던 <아이리스> 드라마에 나왔던 장소로도 유명한 곳이었는데 꽤 낡고 오래된 시설인지라 깨끗하고 현대적인 공간을 원한다면 다소 실망할 수 있는 곳이다.


첫 여행인 만큼 설렘과 낭만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야간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퇴근 후 깔끔하게 샤워를 마치고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밤 11시에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는 그 순간이 개인적으로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 어스름한 작은 불빛, 버스 기사님의 웅얼거리는 안내방송, 고속도로를 들어가기 전에 차창 밖에 비치는 도시의 밤거리를 스치다 보면 첫 여행의 긴장감은 어느새 묘한 안도감으로 바뀐다. 그리고 깊게 잠이 든다. 그렇게 나의 첫 여행은 로맨틱한 판타지처럼 시작되었다.



한참을 달려 새벽녘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마시니 진짜 여행이 시작되었구나 실감이 났다. 츠루노유 온센까지는 버스 정류장에서 산속으로 한참을 들어가야 했지만 다행히 작은 송영버스 한 대가 마중을 나와줬다. 얼마쯤 산길을 지났을까.. 이제 곧 나올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을 때 즈음 그토록 상상만 해왔던 그 공간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여름 장마가 막 시작될 즈음인 6월 말 초여름 막바지였다. 온천은 겨울에 해야 한다는 편견을 완벽하게 깨 준 공간이 바로 츠루노유 온센이었다.


사방이 초록빛 숲으로 둘러싸인 깊은 숲 속 한가운데 짚으로 엮은 초가지붕이 즐 비어 있었다. 언젠가 해리포터 영화에서 봤던 해그리드의 오두막이 여러 채 나란히 즐비해 있었는데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낡은 목조건물로 지어진 오두막 집은 내 상상 속에 있던 그 집과 참 많이 닮아있었다. 여름의 더위를 차분하게 씻겨주던 추적추적 내리던 이슬비도 산 중턱까지 내려온 구름 뭉치들도 운치 있고 다소 쓸쓸한 공간을 완성해 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츠루노유 온센이 유명한 이유는 남녀혼탕이 있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많아 결국 혼탕은 가지 못했지만, 여성전용 노천탕과 내탕만 즐겨도 충분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 있는 온천 / 대중목욕탕을 떠올리면 회색빛의 거무튀튀한 돌로 내장된 욕조가 자연스럽게 생각나는데, 츠루노유 온센의 내탕은 온천에 대한 나의 편견을 크게 바꿔주었다. 세 평 남짓한 공간에 아마도 히노키일 것 같은 나무로 된 작은 욕조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바닥과 세면대, 물을 담는 바가지 모두 갈색 목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은 익숙하지만 그 당시에는 히노키 욕조가 꽤나 충격이었다. 나무로 된 욕조라니 썩지 않을까? 곰팡이는 안 생길까..?라는 걱정이 무색하듯 정말 깔끔하고 아담한 공간이었다.



내탕을 지나 밖으로 나가면 온통 푸른 숲 안에 우윳빛깔의 노천탕이 크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일반 목욕탕의 노천탕은 마치 메인 제품에 딸려 나오는 자매품과 같은 느낌이라면 이곳의 노천탕은 과연 메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크고 널찍했다. 최근 불멍 (모닥불을 피워 놓고 아무 생각 없이 '불'을 바라보며 멍하게 있는 행위)이라는 단어가 유행인 것 같은데 이건 물멍이라고 해야 할까..?


물속에서 가만히 앉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멍하게 눈앞에 펼쳐진 숲을 바라보며 짹짹 거리는 새소리와, 사각거리는 나뭇잎 소리, 그리고 간간히 내 뺨을 스치며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을 피부로 느끼며 '행복하다'라는 생각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온천탕 안에 오래 앉아있기 힘든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그날은 몇 시간을 온천탕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자연 속에서 정말 '자연인이 된 듯한 기분'으로 글로만 배웠던 물아일체, 안빈낙도가 무엇인지 옛 선조들이 자연 속에서 시를 읊으며 왜 이런 단어를 만들었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츠루노유 온센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발을 들어섬과 동시에 외부세계와는 차단된 듯한 공간이 주는 '판타지적인 요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온천 마을' 속에서 자연과 소통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공간 속에서 오감을 통해 느껴지는 행복이란, 속이 꽉 찬 허무한 구석이 없는 그런 밀도 높은 만족감이었던 것 같다. 그 만족감이 사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비싼 와인에 고급진 음식을 먹으면서 느껴지는 행복감과 포만감과는 다른 형태였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소박하고 친숙한 느낌의 행복감이 나에겐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건물 자체가 낡은 목조 식이 었기 때문에 나무 바닥을 걸을 때마다 들리는 뽀드득 소리나, 온천물과 자갈 소리들이 어우러져 들리는 소리들, 객실 맞은편 부엌에선 달그락 거리며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 어딘가 동화 속 삽화에서 본 것 같은 화롯불로 데워지고 있는 된장국의 큼큼한 향과 짭조름한 생선 냄새, 그리고 굴뚝을 통해 피어 나오는 연기와 밥 짓는 냄새까지.. 그 모든 것들이 숲 속 가지각색의 새들의 노랫소리와 어우러져 그동안 머릿속에서만 상상했던 '자연 속에서 만끽하는 행복'을 눈으로, 코로, 입으로, 귀로, 그리고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오감을 자극하는 콘셉트'를 제대로 구현한 츠루노유 온센에서의 하룻밤.

단순히 눈으로만 보이는 화려함에서 벗어나 소리를 통해 느껴지는 편안함과 친근함, 냄새를 통해 느껴지는 아련하고 그리운 정서, 피부로 느껴지는 부드럽고 포근한 감정들, 그리고 향토적이고 소박하며 친숙한 공간의 모습들까지 어린 시절 내가 생각해왔던 그 공간을 현실로 마주한 것 같아 참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그런 첫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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