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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비컨티뉴 Oct 25. 2024

나는 성장기 어린이가 아니다

또 그 시즌이다.

30대까지만 해도 일찍 마치고 놀 계획이나 세웠던 건강검진.

올해는 또 뭐가 새로 나오려나 싶어서 건강검진 신청은 점점 미뤄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미루고 미루다 해를 넘겨 유예기간 끄트머리 3월에서야 건강검진을 받았다.


역시나 콜레스테롤 수치를 시작으로 역대급으로 코멘트가 많았고 간당간당한 수치들도 많아서 결국 의사 선생님께 검진 결과 상담을 받았다.

콜레스테롤 수치는 약을 바로 먹어야 하는 상태이고 평생 먹어야 하는 약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너무 먼 길을 가는 것 같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말을 하면서도 큰 기대는 없었지만 우선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 열심히 해서 다시 오겠다고 하였다.

의사 선생님은 두 달 뒤로 예약을 잡아주시며 “시간은 드리겠지만 결국 드셔야 할걸요”라고 하셨다.

성인병이 생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무슨 반발심인지 조금 울컥했다.


우선 식습관부터 바꿔보기로 했다. (운동도 병행했지만 운동은 따로 또 할 말이 많아서 여기서는 식습관만 이야기해 본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니 요즘 유행하는 3주 스위치온 다이어트를 해보기로 했다.

3주 동안 탄수화물을 제한하고 단백질 중심으로 식단을 하여 지방을 잘 태울 수 있는 몸으로 바꾼다는 방법이었다.


일주일 치 프로틴을 주문했다.

첫 사흘은 물이나 두유에 탄 프로틴만 먹고 탄수화물을 제한한 식사를 조금씩 해나가야 한다. 하지만 물에 탄 프로틴만 마시며 보내는 하루는 너무 길었고 불쑥불쑥 짜증이 올라왔다.

약하게 있던 빈혈도 심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 도전한 날 세 번째 프로틴을 마시고 나니 내 몸이 프로틴에 절여진 것 같았다. 마치 대장 내시경 시약 마시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프로틴 식사 타임.

이래선 사흘이 무엇인가 하루를 완료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지속 가능한 방법을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우리 집 성장기 어린이는 키도 커야 하고 두뇌도 발달해야 하니, 삼시세끼 고기와 밥을 든든히 먹고 영양가 있는 간식까지 챙겨 먹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성장기도 아닌데 간식까지 챙겨가며 너무 많이 먹고 있었다.

이미 몸에 저장된 것이 많아서 콜레스테롤 수치까지 높여 놓았으니 조금 먹게 먹어도 괜찮다는 각오를 다지며, 다이어트 레시피를 검색하고 스위치온 다이어트 식단을 참고해서 대략의 식단 구성을 짰다.

핵심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탄수화물을 최대한 제한하는 것이지만, 너무 배고프면 안 되고 너무 맛없어도 안된다는 것이다.


아침은 간헐적 단식을 위해 건너뛰거나 너무 배고플 땐 그릭요구르트 하나를 먹었다.

점심은 샐러드나 채소반찬을 먼저 양껏 먹고 나서, 찌거나 최소 양념한 고기와 소량의 밥만 먹었다.

너무 배고프지 않게 샐러드나 고기류는 충분히 먹었고, 너무 맛없지 않게 여러 사람에게 검증된 레시피 중 내 입맛에 맞는 몇 개를 정해두고 돌려가며 먹었다. 다이어트를 위한 레시피들이다 보니 조리과정도 단순해서 편하기까지 했다.

저녁은 역시 채소와 고기만 먹고 밥은 너무 배고픈 날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식사 중간에 배고플 때는 방울토마토를 씹거나, 속이 비었다는 느낌을 속이기 위해 따뜻한 보리차를 끓여 마시며 위기를 넘겼다. 방울토마토와 보리차를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이런 식으로 2주 정도 나는 성장기 어린이가 아니다, 이제 내 몸은 많은 음식이 필요하지 않다를 되뇌며 열심히 식단을 반복하니 어느새 루틴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침 한 끼쯤 안 먹거나 적게 먹어도, 끼니마다 고기나 밥을 먹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또 물에 탄 프로틴만 마실 때와 비교하면 너무 행복했다.

쌀 한 톨, 고기 한 점, 채소 한 조각에 이렇게 다양한 맛과 질감이 있다니!


불과 몇 달 전의 나는 아침에 카페라테와 빵을 먹고, 점심에는 남이 해주는 칼로리 듬뿍 밥을 먹고, 저녁에는 가족 다 같이 먹는 것이니 잘 차려서 먹었었다.

그런데 식습관을 바꾸고 입맛이 정직해지니 올리브오일, 발사믹식초로 만든 드레싱만 넣은 샐러드도 너무나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배가 고프다 보니 식사 시간대가 점점 빨라져서 잠도 일찍 자게 돼서 본의 아니게 아주 모범적인 하루 루틴까지 덤으로 얻었다.


하지만 약속, 여행, 명절이 줄줄이 있어서 중간에 고비도 많았다.

어른들과 덥다고 간 냉면집에서 갈비탕을 호호 불며 먹기도 하고, 이탈리안 식당에서 샐러드만 먹기도 하고, 바비큐 할 때는 고기를 도맡아서 굽고 상추 씻으며 최대한 자리를 피했다.

가끔 입이 터진 날은 다음날 채소 수프로 잘 수습하면서 고비를 넘겼다.


두 달이 지나 드디어 재검 결과 듣는 날!

체중은 무려 6kg이 줄었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무려 20이 낮아졌다. 정상보다 10이 높던 수치가 정상 대비 10이 낮아진 거다. 성적표를 받고 기뻐하는 나를 보며 의사 선생님은 채찍질을 멈추지 않으신다. 갱년기가 되면 수치가 갑자기 확 뛸 수 있다며 들뜬 나를 누른다. 중간고사 잘 봤다고 들뜨면 기말고사 망친다고 협박하던 그 시절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마음은 이미 모락모락 새로운 상상을 하며 즐거워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건강 체중이 아니라 미용 체중에 도전하고 싶어진 거다. 건강해지는 게 목표였는데, 예뻐지고 싶어졌다.


체중이 줄어드니 이제는 어떤 옷을 입어도 여유가 생겨 몸도 가볍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내게 맞는 가볍고 쉬운 방법이라면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 것이 가장 큰 성과이다.

몸이 가벼워지니 자신감과 함께 “그냥 하면 되지 뭐” 정도의 생각과 기분이 유지되어 마음도 훨씬 가벼워졌다.


체지방이든 뭐든 이렇게 조금씩 덜어내다 보면 노안이나 흰머리에 대한 당황스러움, 회사에서 내 역할에 대한 고민, 아이와 부모님에 대한 걱정들도 가볍고 쉽게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이 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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