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삶의 무의미의 의미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역시 내가 귀여운 탓인가, 라고 생각하자

by 김스타우트

간밤에 치러진 거사의 흔적을 지웠다.

락스를 묻힌 솔로, 변기에서부터 이어진 갈색의 길을 따라 침대 옆 80세 노인에게 도착했다.

침대보를 빨기 위해, 그를 일으켜야 했다.


이곳 미국 워싱턴에 공식적으로 이사 온 지 1년 하고 5개월. 각본 작업에 몰두했다면, 아마 두세 편의 초고는 쓸 수 있었을 텐데, 여기선 똥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삶 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내가 미국에 오게 된 이유는 나의 비생물학적 가족인 토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 자랐지만 도무지 그들과 성향이 맞지 않았던 내게, 토니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가족의 따뜻함을 주었고, 생물학적 가족으로부터의 피난처를 제공해 주던 사람이었다. 그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라는 말을 했지만 사실 그의 임종까지 대체 몇 년이나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과연 내가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을지 역시도 의문이다.


1945년생인 토니는 2018년 혈액암을 진단받았다. 물론 혈액암 외에도 당뇨 2형, 척추 골절 수술로 인한 후유증, 심장질환 등을 갖고 있다. 치아가 없지만 잇몸 위아래에 임플란트가 하나씩 있고, 요실금으로 기저귀를 차는 노인이다. 이 노인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쇠약해지며, 냄새가 난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는, 약 7년 전 내가 그에게 한 약속 때문이었다. 내가 꼭 임종을 지키겠노라고. 혼자 쓸쓸하게 침대에서 죽게 하지 않겠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과하리만치 낭만적이었구나 싶다. 거의 치사량의 낭만이다. 그리고 동시에, 지리멸렬했다.


IMG_9931.JPG 토니 호프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은, 영화처럼 극적이지 않다. 그는 자주 자신이 했던 말을 잊는다. 가끔은 인종차별적인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바란다. 더는 논리적인 대화가 어려운 그와 나는 오히려 더 자주, 더 오래 마주 앉는다. 거동이 불가능한 몸으로, 입버릇처럼 여행을 가자고 말한다. 지금도 그는 책상에 앉은 내게 이름을 부르고 있다.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그는 나의 이름을 여러 차례 부른다. 이 거대한 집에서 내가 숨을 곳이 없다.


그는 자꾸만 뭔가를 한다. 가구를 사고, 사람을 불러 집을 리모델링하고, 혼자 뒷마당 잡초를 캐다, 넘어지고, 아파한다. 한 번 아프기 시작하면, 침대에 누워 며칠이고 누워있기만 한다. 그러다가, 침대에서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갈색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비위가 약한 나는 코에 티슈뭉치를 꽂고, 락스로 바닥을 닦는다. 그가 주문한 가구를 조립하고, 그가 캔 잡초를 버린다. 최대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원인과 결과를 사유할 수 있는 힘은 이 상황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IMG_9224.jpeg 그의 거대한 침실

아마 나는 낭만이라는 종교를 숭상했던 것 같다. 내가 예술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작가를 꿈꾸고, 창작하는 일을 계속해왔던 것도, 예술을 하는 나 자신이 좋았다. 그런 나 자신이 좋았다. 그래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이 노인과 한 지붕에서 지내는 것이, 여기에 오기 전에는 꽤 할만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한동안 이곳에서 나의 존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계속 생각했었던 것 같다. 대단히 미안하게도, 나는 의미를 찾는데 실패했다.


토니를 돌보기 위해 한국에 남겨둔 남편 S는 이런 나의 결정을 이해하면서도 힘들어한다. (그의 바다처럼 깊은 이해심에 감사한다.) 미국사람인 S는 첫 직장을 한국에서 구한 이후, 한국에서 쭉 살고 있는 그는 도리어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워, 마지못해 한국에 남았다. 나 역시도 이곳에 도착하고 난 이후 직장을 구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영화와 주로 관련된 경력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별 쓸모가 없었다. IT, 테크 위주의 업종이 발달한 곳이라 그렇기도 했지만, 토니를 너무 오랫동안 집에 혼자 두면 안되어서이기도 했다. 그는 내가 없을 때 불안해했고, 나는 이제 그게 부담스럽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든,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든, 모두가 입을 모아 나도 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왜 내가 이 지독한 삶을 계속 살아내는지에 대해 자주 생각을 한다. 물론 그에 대한 답도 항상 정해져 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서. 그렇게 생각에 생각에 꼬리를 문다. 토니가 죽어도 내 삶은 지속된다. 나는 내 삶을 살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허나 그 의무와 책임은 노인 부양이라는 일과는 양립하지 않는다.


그는 죽어도 양로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건 아마도, 그곳이 그의 삶의 마지막 종착지라는 것을 그 역시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 들어가면,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그가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역시도 그의 삶의 의미가 단순 생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내게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삶의 의미였으며, 그것은 짙은 휘발성을 지녀 너무도 가벼웠다. 하지만 나는 한 명의 인간이었고, 인간인 나는 이 고통의 의미를 계속해서 찾기만 할 뿐이었다.


오늘 아침에 락스로 바닥을 닦고, 침대보를 빨다 불현듯, 이런 생각을 했다. 이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의미 찾기를 포기했다, 문득. 세상에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나의 믿음, 낭만은 이제 점점 부스러져 가루가 되어 공기를 타고 날아간다.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나는 요즘,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예전 인터넷에서 본 어떤 글을 생각한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역시 내가 귀여운 탓인가,라고 생각하자. 참으로 반가운 말이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삶이 버거울 때면, 삶의 의미를 찾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귀여워서 그런가 보다, 하면 되겠구나. 무의미한 그의 삶도, 그 무의미한 삶을 지키는 나의 삶도, 그냥 귀엽게 봐줄 수 있다면 좋겠다.


IMG_1835.jpeg 한국에서 데리고 온 강아지 두비. 내가 죽으면 안 될 또 다른 이유를 제공한다.


물론 본디 인간이란 게, 유쾌하지 않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하면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고통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재정비하게 한다. 그래서 인간이 진짜 미쳐버리는 상황은, 이 고통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때다. 자신이 감내하는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을 때, 사람은 조용히 무너진다. 그래서 나도 오늘 같은 날은 좀 우울하다. 아마, 내가 귀여워서인가 보다.


가끔 토니를 두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나 없이 버틸 수 없다는 건 안다. 아마 몇 개월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가기 싫어하는 요양원에 가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도 8년 전, 그에게 했던 약속을 지킨다. 나의 삶을 살짝씩 좀먹으면서, 삶의 무의미의 의미를 곱씹는다. 치사량의 낭만에 중독된 드라마퀸. 사실은 나, 진짜로 좀 귀여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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