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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호박 Dec 10. 2022

밀당의 달인을 만나다

사계절 변화무쌍 저지오름의 숲길

 몇 개월을 거의 매일 올라서 익숙했던 고내봉을 뒤로하고 금오름에 도전하기 전에는 사실 두려움도 있었다. 

 고내봉이 워낙 작은 오름이기에 내가 과연 다른 오름들의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고내봉이 아닌 오름에 오르는 데 성공했고, 생각보다 힘들지 않음을 경험한 나는 그야말로 자신감에 어깨가 하늘 위로 솟아있었다. 

 무서운 경사와 많은 계단을 품은 고내봉에 비해 시멘트길을 편하게 오르면 되었기에 덜 힘들었던 것인데 금오름에 한번 올랐다고 난 세상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을 얻었다. 

 요즘 사람들은 그것을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한다는데 그때의 내가 그랬다. 그래서 자기애도 넘쳐났다. 

 둘째를 케어하느라 체력이 바닥나서 신우신염으로 쓰러져 입원했을 때, 살이 찌니까 아픈 거 아니냐며 살 좀 빼라고 날 나무라던 올케언니도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런 올케언니에게 언니도 그렇게 일만 하지 말고 나처럼 운동 좀 하라고, 오름에 오르던지 올레길을 걸으러 다니던지 하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운동을 시작하고 달라진 나를 보며 올케언니도 퍽이나 큰 자극을 받았던 것 같았다. 얼마 후 헬스클럽에 등록했다며 열심히 운동할 거라는 다짐을 나에게 이야기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고내봉에 오르며 힘들어 쓰러지는 내 부끄러운 모습을 알고 있는 일명 '고내봉 클럽'의 두 언니도 나에게 예전과는 달라졌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난 겉모습만큼이나 체력도, 내면도 많이 변화해있었다. 

 





 왠지 금오름이 아닌 다른 오름도 쉽게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갑자기 제주도내에 있는 모든 오름(368개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을 한 번씩 다 등반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버렸고, 나는 그렇게 새로운 오름을 찾다가 저지오름을 알게 되었다. 


 저지오름은 2007년에 있었던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아주 유명한 분(?)이다. 

 비고는 100m로 135m인 고내봉과 178m인 금오름과 비교하면 그리 큰 오름이 아닌 것 같지만 금오름의 분화구 둘레만 800m나 된다. 게다가 오름 정상까지 직선코스가 아닌 둘레길을 따라 둥글게 돌며 오르는 

코스여서 왕복시간이 고내봉과 금오름보다는 조금 더 소요되는 오름이다. 





 마을 안 예쁜 길을 따라가서 저지오름 초입에 서면 돌계단을 만나게 된다. 

 고내봉의 계단을 경험한 뒤로는 이런 계단에 겁먹지 않는다. 

 다만 이 계단 저편으로 보이는 저 우거진 숲을 빨리 보고 싶은 설렘만 가득할 뿐. 

 아직 숲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풀냄새가 진동을 하고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을 안에 있는 오름이라 그런지 혼자 등반하는 사람들도 꽤 보였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 코스가 끝나 허벅지에 자극이 오고 숲이 차오를 때, 이런 숲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와~~~ 너 이래서 아름다운 숲 대상 받았구나~~~~


 라고 저지오름에게 말을 건네며 감탄하기 바빴다. 

 이 숲길은 정말 큰 매력이 있다. 

 봄에 걸으면 향긋한 향이 진동을 하고, 여름에 걸으면 시원하고, 가을에 걸으면 청명하고, 겨울에 걸으면 포근하다. 

 분명 마을 안에 있는, 사람들과 가까운 오름 이건만 왠지 이 숲길을 걷고 있으면 난 세상과 한발 떨어져 있는 공간에 와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고요하기는 또 얼마나 고요한지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마다 부딪히는 나뭇잎들의 소리는 그 어떤 노래보다도 좋다.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의 야자수매트와 안전을 위한 밧줄만 설치되었을 뿐이어서 더 좋은 곳이다.  

 하지만 저지오름은 반전이 있는 녀석이었고, 밀당을 아는 녀석이었다. 

 숲길을 감상하며 편한 야자수매트 길을 걷다가 허벅지가 좀 편안해진다 싶으면 뜬금없이 계단 코스가 몇 개씩 나온다. 중간중간에 만날 수 있는 계단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평지를 걷다가 편안해질 때 즈음에 짠하고 나타나 허벅지에 자극을 주기에 충분하다. 

 너무나 밀당을 잘 아는 저지오름이다. 

 둥글게 둘레길을 따라 정상을 향해 가다 보면 숨이 한번 깔딱하는 일명 '깔딱 고개'가 나온다. 

 고내봉만큼 심한 경사는 아니지만 일정한 오르막이 계속되는 구간이 있다. 

 늘 그 구간을 오를 때, 삼다수 500mL 한 병을 다 먹는 것 같다.


 한 번은 그 깔딱 구간을 올라가다가 너무 힘들어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낮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낮달을 보며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물 한 모금 더 마시고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 구간을 만났다는 건 정상이 얼마 남지 않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이 구간이 가장 힘들긴 하면서도 반대로 힘이 솟아나기도 한다. 

 이 깔딱 구간이 저지오름의 마지막 깔딱 구간이다. 이 구간이 끝나고 나서 다시 야자매트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고내봉, 금오름만 가본 상태에서 저지오름을 처음 갔던 날 이 정상에서의 비양도 뷰를 보고 너무 황홀했던 기억이 난다.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면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는데 미세먼지 수치가 좋은 날에 오르면 그것 없이 맨 눈으로 봐도 비양도, 산방산, 한라산, 금오름 등 너무나 선명하게 잘 보인다.

 

 지금도 저지오름에 갈 때면 정상에서 넋을 놓고 가만히 경치를 즐긴다. 

 그곳에 있으면 어떤 걱정거리도, 마음의 짐도 잊게 된다.

 난 제주도에 있는 모든 오름을 정복할 거라고 굳게 다짐했는데, 어찌 된 것이 오름 하나하나 오를 때마다 각각의 오름의 매력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보니 오히려 내가 오름에게 정복당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게 한참 오름과 사랑에 빠져있을 때, 국가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다. 

 사실 그동안은 겁이 나서 오랫동안 받지 않았었다. 

 하지만 더 이상 피할 수도 없었고,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이자 하는 생각으로 덤덤하게 검진을 받았다.

 

 내 인생 또 한 번의 터닝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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