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계단을 품고 있어 끔찍하게 예쁜 정물오름
당화혈색소 7.8 , 공복 혈당 126.
당뇨에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아차릴 이 수치들은 현재 내가 당뇨병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당화혈색소는 최근 3개월 간의 내 혈액 속 당 수치이며, 정상인은 5.7 이하다.
5.7 ~ 6.4 까지는 당뇨 전 단계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 이상은 당뇨병이라 정하고 있다.
아침에 어떤 음식물도 섭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측정한 혈당은 126을 넘어서는 안된다.
공복혈당 126부터 당뇨병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 나이 42살, 당뇨병이 왔다.
외할머니가 당뇨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흔히들 말하는 '당뇨발'로 엄청난 고생을 하셨다.
발가락에 작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서서히 곪아가며 썩어 들어가더니 급기야 그 부위의 피부가 검게 변한걸 직접 보았다.
엄마 또한 당뇨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나보다 훨씬 더 젊은 나이에 이미 당뇨병 판정을 받으셨고, 결국 그 합병증인 급성 뇌경색으로 돌아가셨다.
당뇨는 가족력의 영향을 너무나 많이 받는 질환이다. 외할머니와 엄마가 당뇨로 그렇게 고생하시는 걸 봐왔기 때문에 한참 살이 쪄오면서 비정상적인 목마름이 찾아올 때마다 애써 외면했었다.
난 아닐 거야. 내가 설마 당뇨일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당뇨일까 봐 무서워서 병원을 피했다.
그런 내게 결국 당뇨병이 다가왔다.
병원에서 당뇨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순간 가슴에서 뭔가 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소견도 있었다.
나를 담당하는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통 당뇨와 함께 찾아오는 여러 좋지 않은 수치들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혈압도 정상이요, 간 수치도 정상이요, 콜레스테롤 수치도 정상이라는 것이다.
딱 하나, 당 수치만 높은 거라고 했다. 보통 이런 경우는 복부비만 문제만 해결해도 정상적인 당 수치가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며 예후가 좋은 편이라고 해주셨다.
이러한 의사 선생님의 소견은 내게 큰 희망이 되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달려야 할 목표가 생긴 것이다.
내 예상으로는 운동을 시작하기 전 건강검진을 받았다면 아마 당장 입원 치료를 해야 했을 수도 있다.
홈트를 하고, 오름에 오르며 더 좋지 않았던 수치가 그나마 좋아졌다고,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래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외할머니와 엄마가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신 모습이 나를 힘들게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내가 왜 이제야 오름의 재미를 알았을까, 몇 년 전에만 알았어도 난 이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라며 한탄을 하고는 했다.
하지만 나의 그런 한탄을 들을 때마다 남편은 내게 말했다.
본인은 내가 이제라도 그 재미를 알게 된 것에 늘 감사하다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그동안 해온 모습들을 보았을 때 넌 당뇨 따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날 굳건히 믿고 있는 남편의 응원은 늘 나에게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난 또 올라야 한다.
고내봉, 금오름, 저지오름의 정상을 몇 번씩 오르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새로운 오름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오름이 정물 오름이다.
가족 나들이를 갈 때마다 입간판을 몇 번 봤어서 익숙했던 오름이었다.
나와 함께 오름을 가고 싶다는 남편과 두 아이를 데리고 햇살 좋았던 5월의 어느 날, 정물오름에 올랐다.
가족 모두 함께 오름을 오르는 것은 처음이었어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매우 들떴던 날이었다.
정물오름은 비고가 150m로, 고내봉 보다는 높고 금오름 보다는 조금 낮은 오름이다.
내가 열심히 검색한 바에 의하면 정물오름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두 가지인데, 한쪽은 굉장히 힘들고 다른 한쪽이 오르기 편하니까 편한 쪽으로 오르고 힘든 쪽으로 내려오는 게 좋다고 했다.
검색을 너무 열심히 했던 탓일까.
' 왼쪽 코스가 완만하니 왼쪽으로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내려오라 '던 것을 무슨 정신에서였는지 ,
' 오른쪽 코스로 오르고 왼쪽으로 내려오라 '고 착각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그날,
이 계단을 끊임없이 올라야 했다.
오르면서 남편과 아들은 계속 내게 물었다.
이 길이 맞아? 하... 너무 힘든데? 이게 편한 길이라고?
정물오름 비고가 150m인데, 나의 실수로 들어선 이곳은 150m 위에 있는 정상까지 쉬지 않고 이 계단을 올라야만 하는 코스였다.
야자수매트 따위 없다. 평지 따위 없다. 정상까지 오로지 이런 계단으로만 올라야 한다.
조금 오르다 보면 편한 길이 나오겠지 하면서 오르다 보니 다시 내려가기도 힘들어져 버렸다.
생수 500mL짜리를 5병 정도 사갔었는데 정상에 도착해보니 한 병도 남지 않았을 정도로 우리 가족은 힘겹게 올랐다.
아들은 엄마와 처음 가 본 오름에서 심히 놀랐는지 연신 엄마 정말 대단하다며, 매일 이런 곳들을 찾아다니며 운동하는 거냐 묻기도 했다.
정물오름에 오르는 계단 코스 내내 먼 곳의 경치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시야를 다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갔던 때는 날씨가 매우 더웠는데 모두 그늘 길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좋았다.
혼자 올랐다면 새소리와 바람소리에만 집중하며 올랐을 텐데, 처음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오르는 거라 신이 나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며 올랐다. 그것 나름대로 너무 좋았다.
올라가면서 한 3번은 쉰 것 같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분들이 우리 가족에게 아이들이 이 힘든 코스로 잘 오른다며 칭찬해주셨다. 그곳으로 오르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참...
정말 몇 계단 더 오르면 죽겠다 싶을 때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네 가족은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숨을 고르고 나서야 주변 경치 감상을 하기 시작했다.
힘들게 올라서 더 그랬을까. 정상에서 바라본 뷰는 정말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멀리는 산방산, 가까이는 금오름도 보였다.
재잘재잘 신나게 이야기하며 올랐던 두 아이도 잠시 아무 말 없이 경치를 감상했다.
경치에 취해 그 순간만큼은 정상까지 올라오며 만났던 계단들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남편은 몇 년 전, 나와 산방산에 오를 때 너무 힘들어 다섯 번 넘게 쉬던 내 모습이 생각났는지 체력이 많이 올라오긴 했나 보다고 너무 잘했다는 말을 내게 건넸다.
참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날 설레게 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니 더 예뻐 보이는 정물오름이었다.
저 멀리 볼록볼록 올라온 오름들을 보라.
제주에 있는 368개의 오름에 반드시 모두 올라보리라!
하산길에 뒤돌아 찍은 모습이다.
그래, 우리는 이곳으로 올랐어야 했다. 야자수매트가 쫙 깔려있고 시야가 탁 트인 이 코스로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을 헷갈리는 바람에 너무나 힘든 코스로 온 가족을 이끌고 가게 되었다.
하지만 힘든 만큼 너무 즐거운 경험이었고, 그 뒤로 아들은 학교 방학 때마다 매일 아침 나와 함께 오름에 오른다. 아들도 오름의 재미에 빠져버린 것이다.
정물 오름이 나에게 든든한 평생 오름 친구를 만들어 준 것이다.
몇몇 헬스클럽에는 '천국의 계단'이라는 운동기구가 있다.
러닝머신과 비슷한데 다만 끊임없이 계단이 나오는 운동기구다.
사람들이 '천국의 계단'이라 부르는 이유는 너무 힘들어서 운동하다가 저승(천국)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난 그 천국의 계단을 정물오름에서 만났다.
그런데 어찌 된 일 일까.
분명 다음에 갈 때는 헷갈리지 않고 편한 코스로 가야지 하고 내려왔었는데 정물오름에 다시 오를 때도 난 천국의 계단으로 오르고 있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느낌과 숨이 턱 끝까지 차는 그 느낌. 진짜 중독성 있다.
그 중독성에 한껏 취해 당뇨 따위, 남편 말처럼 멀리 물리쳐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