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주는 통로가 잘 열리는 사람이 있다.
먼저 다가가주고, 관심 가져주고, 도와주고, 지켜봐 주고, 좋아해 주기도 하고.
마음을 받는 통로가 잘 열리는 사람이 있다.
상대가 다가오는 길을 열어주고, 관심을 자연스럽게 받고, 호의를 기쁘게 받고, 누군가 지켜봐 주는 것을 허용하고.
여기에서 상성이 생긴다.
주는 통로가 잘 열리는 사람과
받는 통로가 잘 열리는 사람이 만나면, 흐름이 원활하게 흘러간다.
물론 일방향이라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긴 하지만.
주는 통로는 잘 열리는데, 받는 통로는 꽉 닫아두는 사람이 있다.
따뜻하고 헌신적인 사람이지만 사랑받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고 두려움도 있는 사람.
이런 좋은 사람 두 명이서 만난다면 흐름이 잘 흐르지 않을 수 있다.
서로가 적극적으로 주는 것을
서로가 못 받아들이고 당황스러워 할 수도 있다.
받는 통로만 잘 열려있는 사람 두 명이 만나면 오가는 것이 없을 것이다.
서로 먼저 다가가지도 않고, 관심을 주지도 않고, 바라봐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사람도 서로 나눌 수 없다.
제일 좋은 것은 두 통로가 다 잘 열리는 사람 두 명의 만남일 것이다.
서로가 주는 것을 서로 감사히 받고, 다시 기쁘게 주고받을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둘 다 잘하는 게 최고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관계에 대해서 익숙한 것과 어색한 것이 있고,
그것에 따라 상성이 생긴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관계가 잘 안 풀리는 것이 내 탓이 아닐 수도 있고 단기간에 해결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에게 마음을 쓰고 헌신하지만
이용당하고 호구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받는 통로가 막혀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잘 연애하다가 결국에는 상대가 지쳐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자신이 타인에게 마음을 주는 것에 대해서
어떤 경계심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헌신적인 부모와 받는 것이 익숙한 자식은 한 몸처럼 융합되어 움직인다.
자식은 끊임없이 받고, 부모는 준다.
이런 관계는 궁합이 잘 맞아 생각보다 오래 생존하긴 하지만,
결국 자식은 주는 것을 어색해하게 되고, 부모도 받는 것이 어색하다.
이런 상황에서 형성된 기형적인 관계 방식을
배우자나 연인이 고스란히 겪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주는 마음보다 받는 마음이 더 관계를 결정짓는다고 느낀다.
받는 것에 열려있다는 것은 착취적이고 호의를 당연시한다는 것이 아니다.
받음에 감사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당신이 나를 좋아해 주고 지켜봐 준다면, 나는 매우 감사하고 기쁠 거예요.'
이런 마음은 인간 신뢰가 형성되고 나서야 생긴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인간 신뢰가 무너져있으면, 상대방의 호의도 무섭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점심에 뭘 먹었냐고 물어봐주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이 드는가?
'궁금한 것도 많네'라고 느낄 수 있지만
진심으로 '관심이 참 고맙고 기쁘다'라고 느낄 수도 있다.
타인이 주는 마음에 아이처럼 기뻐한다는 것은 상당히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진난만한 아이도, 상처투성이의 어른도 아닌,
지금의 나로서 마음을 받는 법을 다시 익혀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