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9개월 전, 에스토니아 탈린에서의 작은 다짐
풀타임 MBA에 다니다 보니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는 수업과 활동으로 일정이 꽉 차 있고, 저녁에는 또 그만큼 많고 다양한 술자리가 이어지기도 한다.
다행히도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술자리다. 술을 강요하는 사람은 없고, 자그마한 잔에 맥주를 따라 홀짝거려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혹시 있으면 팔 걷고 술 배틀이라고 붙을 수도 있다…라고 하기엔 내 건강이 이제는 너무 소중해져 버렸다.)
그래서 컨디션이나 텐션 상관없이 그냥 참가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오히려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가끔 술자리에서 술 선호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예전에 거의 3년 가까이 술 끊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을 하게 될 때가 있다. 하지만 괜히 길게 설명하기에는 번거롭고, 내 얘기만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보니 그냥 대충 넘어가곤 한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다. 5년 9개월 전, 아주 우연하고도 사소한 계기로 내가 술을 끊기로 결심했던 그때가.
다른 곳에 기록해 둔 그때 그 기억을 브런치스토리에 소환해볼까 한다.
어쩌면 80살 먹고도 다시 불러낼만한 기억이니까.
탈린(Tallinn) 30/12/2019 – 01/0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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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탄지 않은 시작
탈린의 첫인상은 리가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공항이 아닌 버스역을 나오서 탈린에 첫 발을 딛게 될 거니까. 버스역은 대부분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아마 리가 공항을 벗어날 때 느꼈던 그 당황스러움은 없겠지?
티켓에 써진 대로 8시 정각에 출발한 리가-탈린행 버스.
티켓을 미리 산 덕분에 일인석에 앉아 편히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아직은 깜깜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좋은 풍경이 펼쳐지겠지.
탄산수와 요구르트를 번갈아 마시며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는데, 정작 창밖에 보이는 건 우중충한 짙은 구름 아래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들 뿐. 급기야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은 챙겼지만 추운 겨울비라 기온이 확 떨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아침을 적게 먹었기에 혹시 체온까지 함께 떨어질까, 중간중간 버스 안 커피자판기에서 라테를 두세 번 뽑아 마셨던 것 같다. 그렇다, 신기하게도 이 버스에는 동전을 넣으면 커피를 뽑을 수 있는 커피자판기가 있고, 작지만 깨끗한 화장실도 있다. 발트 지역에서 장거리 버스를 타야 한다면 Lux Express를 추천한다.
탈린에 도착하니 오후 1시. 비도 조금 잦아든 듯하고, 호텔까지 가는 길을 검색해 보니 택시 18분, 버스 22분, 혹은 도보 32분. 셋 다 큰 차이가 없으니, 차라리 돈도 아끼고 탈린의 분위기도 느껴볼 겸 걷기를 선택했다.
32분 걷기라, 이 정도면 가벼운 산책이겠지?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작아졌다 싶었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는데, 난 이미 버스역 근처를 벗어난 뒤라 도망칠 방법이 없다.
우산이 있으니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맵도 확인해야 했다. 비는 점점 세지고, 손바닥만 한 우산이 열심히 걷는 나를 얼마나 막아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와중에 캐리어 바퀴에는 진흙이 쏙쏙 잘도 들어갔다.
그리고 난 왜 "버스역은 대부분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라고 생각을 했을까? 주변에 볼거리는커녕 평범한 주택가 같고, 날씨 탓에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15분쯤 걸었을까, 작은 쇼핑몰이 보여서 푹 젖은 옷을 정리하고 화장실도 갈 겸 들어갔다. 화장실 입구에 ATM 같은 기계가 보였다. 아, 0.3유로를 카드로 긁어야 문이 열리는 방식이다. 다른 사람이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난 문명한 시민이니까”라고 생각하면서 카드를 긁었다.
결제 성공. "삐-삐-삐-삐-삐" 경고음이 다섯 번 울리는 동시에 화면에는 숫자가 5부터 1까지 소리에 맞춰 내려왔다. 5초 기다리고 열면 되겠구나 싶어 마지막 "삐-"에 맞춰 문을 밀었다. 응? 왜 안 열리지?
10초 만에 깨달았다. 그 다섯 번의 경고음과 숫자는, 5초 안에 문을 밀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구나. 허탈했다. 결국 문명한 시민이고 뭐고, 다른 사람이 들어갈 때 얼굴에 철판 깔고 함께 들어갔다, 짧은 해석은 했지만.
날씨 탓일까, 탈린에서의 첫 시작이 심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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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잡힌 플랜
잠깐 휴식은 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로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겨우 오후 1시 반인데 비실대는 내 모습이 우스워, 가는 길에 괜찮다 보이는 커피숍에 들러 카페인과 당을 보충하기로 했다. 마침 쇼핑몰과 호텔 중간 지점 근처에 카페가 있어 그쪽으로 향했다.
계획대로 커피와 디저트를 시켰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영어실력이 라트비아보다 나을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주문이 쉽지 않았다. 설마 내가 비 맞고 초췌한 모습으로 들어와서 무시당하는 건 아니겠지?
자리를 잡고 창밖을 마주하여 앉았다. 커피 두어 모금 마시고 디저트를 먹으려는데, 아, 티슈가 없네. 마침 서빙하는 직원이 근처에 있어서 영어로 티슈를 부탁했다.
그런데 예의 갖춰 단어 바꿔가며 4-5번 말했는데 대체 왜 못 알아듣지? 겉으로는 티 안 냈지만 속으로는 슬슬 화가 치밀었다. 최대한 태연한 척 다시 자리에 앉으니, 옆 테이블 사람이 직원에게 뭐라고 했고, 기적처럼 티슈가 내 앞에 놓였다. 와, 현지인한테 도움을 받은 거다. 고맙다고 인사 한마디 건넸다.
다시 커피와 디저트에 집중하려던 순간, 갑자기 독일어가 들려왔다. 애매한 내 독일어 실력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익숙한 단어가 들리면 귀가 번쩍 트이는 수준이다. 설마 독일인 여행객? 그렇다면 아까는 어떻게 에스토니아어로 직원에게 부탁할 수 있었던 거지?
기력이 조금 돌아오니 궁금증도 생겼다. 고개 돌려 확인하고 싶진 않았지만, 독일어와 영어를 번갈아 쓰며 통화하는 이 사람이 궁금했다. 말을 걸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통화가 끝나는 걸 확인하고도 한참이나 끙끙대다 결국 용기를 냈다.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 혹시 너도 여행하러 온 거야? 독일어를 들은 것 같아서 말이야." (영어라 존칭 구분은 없다.)
"여행은 아니고, 여기가 고향인데 지금은 스위스에서 일하고 있어. 잠깐만, 내가 하던 거 끝내고 네 테이블로 갈게." 그렇게 말한 그는 30대 후반-40대 초반쯤, 눈짐작으로 키는 190cm 정도 되어 보이는 갈색머리 남자였다. 전체적인 외모, 표정, 분위기 모두 유럽 회사에서 흔히 만날 법한 동료 이미지라 그런지 전혀 낯설고 불편하지 않았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참 이상했을 것이다. 비 맞고 꾀죄죄하게 들어와 티슈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하는 동양인이 자기의 독일어를 귀신같이 알아들었다니. (이 사람을 A라고 부르겠다).
약 10분쯤 지나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기본적인 소개에서 시작해, 여행했던 유럽 도시 이야기, 회사 이야기 등등. A는 탈린 출신으로, 스위스에서 산 지 12년쯤 됐는데 크리스마스에 할머니를 뵙고 돌보기 위해 어제 탈린에 왔다고 했다. 내가 아무 계획 없이 왔다고 하니 탈린 공짜 투어 사이트를 추천해 줬다.
한 시간쯤 더 대화를 이어간 뒤, A는 이제 가야 한다며 명함을 건넸다. 그러면서 탈린처럼 아름다운 도시를 공짜 투어 한 번으로만 즐기기엔 아깝다며, 원한다면 저녁 여섯 시쯤 탈린 야경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와, 나에게도 이런 좋은 일이 생기다니. 결국 우리는 왓츠앱으로 번호를 교환했고, 나도 호텔 체크인을 위해 자리를 떴다.
너무 서둘렀던 탓일까, 테이블 위에는 A의 명함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건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내가 명함을 챙기지 않는 걸 보고 A도 의아했지만 그러려니 했다고 했다.)
호텔이 관광객이 많은 탈린 옛 시가지 (old town)에 있는 데다가 또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기대치를 많이 낮췄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진으로 보면 멀쩡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벌레가 나올 법한 낡은 방에, 샤워기를 틀면 물이 화장실은 물론 침대 근처까지 번질 정도였다. 잠잘 때가 아니면 단 1분도 있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 차라리 추워서 덜덜 떨더라도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커피를 마시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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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곳 두 번씩 구경하기
탈린의 해는 리가보다 조금 더 일찍 저물었다.
오후 5시가 저녁 9시 같은 느낌인 건 두 곳 다 마찬가지지만, 여기에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왜 그럴까? 탈린 옛 시가지는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이라, 명절이면 여행객으로 붐비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약속대로 6시부터는 A의 가이드에 따라 이곳저곳 거닐기 시작했다. 현지인 시각으로 풀어내는 탈린의 역사를 친구와 대화하듯 편하게 들을 수 있어서, 오늘 하루 안 풀렸던 스트레스가 눈 녹듯 사라졌다.
2시간쯤 투어를 마친 뒤 간단히 저녁도 먹었던 것 같은데, 사진도 없고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도 없었다. 아마 10시-11시쯤 호텔로 돌아가 휴식했던 듯하다.
여기서 짧게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서양권에서 유학이나 장기 거주 경험이 없다면 살짝 놀랄 수도 있는 부분. 혼자 여행하는 여자가 겁도 없이 낯선 사람과 연락처를 주고받고 저녁에 만난다? 요즘 중국 모 도시의 납치/감금 사건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름의 판단이 있었다.
1. 예전에 나라와 문화 배경이 제각각인 사람들과 어울리며 영어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미약하게나마 탐지 능력이 생겼다. “이 사람은 단순히 호기심이 많고 친해지고 싶어 하는구나”, “저 사람은 있는 척하며 내가 감탄하게끔 유도하는구나” 하는 식으로.
2. 대화를 하다 보면 디테일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뭔가 앞 뒤가 잘 안 맞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회사나 업무 얘기를 들어봐도 산업/부서/타이틀 다 매칭이 되고, 이상한 멘트나 선을 넘는 호기심도 없었다.
3. 내성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성격은 아니지만,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건 여전히 어색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끼리 쉽게 친해지는 걸 보면 늘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강철 멘탈과 강한 사교성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하며. 아무도 모르는 나라에 와서, 게다가 대화도 통하는데 굳이 쭈뼛거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 이런 내 나름의 판단이 있었으니, 너무 무모하다 여기기보다는 그냥 여행 이야기로 집중해 주면 좋겠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방은 전혀 깔끔하지 않았지만, 겉모습은 동유럽 답게 예쁜 호텔에서 먹는 아침은 꽤 러시아식이었다. 주변에서도 러시아어가 자주 들렸는데 아마 러시아 여행객 위주로 장사하는 호텔 같았다.
아침을 먹고 어제 예약해 둔 공짜 투어를 위해 12시 무렵 약속 장소로 향했다. 나와 비슷한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고, 결국 30여 명이 함께했다. 가이드는 몇몇 지점에서 역사 이야기를 들려줬고, 투어가 끝나면 팁을 주는 방식이었다.
투어를 하다 보니 결국 다 어제저녁에 A랑 갔던 곳임을 깨달았다. 같은 곳을 두 번씩 본 셈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일단 밤, 낮으로 풍경이 완전히 달랐고, 개인 날씨와 흐린 날씨의 차이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역시 여행을 즐기려면 날씨를 충분히 고려해 일정을 잡는 게 중요하구나 싶었다.
할 일도 없으니 근처에서 연극이나 보려 결정했다. 어제 비가 쏟아져 사진만 찍고 지나쳤던 오페라 극장이 생각났다.
분위기 있어 보이는 연극. 시간도 마침 오후 2시 시작이라 고민 없이 20유로를 내고 표를 샀다. 리가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본 걸로 만족하려 했는데 탈린에서 더 재미있는 연극을 보게 되는 건가?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입장객 대부분이 50~70대로 보이는 어르신들. 뭔가 잘못됐다 싶을 즈음 막이 올랐다. 고대 뮤지컬? 악기, 의상, 표현 방식, 심지어 억양까지 내가 생각했던 연극과는 전혀 달랐다.
긴 "연극"이 끝나고 이 에피소드를 A에게 문자로 전했다. A도 황당했는지, 아주 특이한 연극이라 자신도 본 적이 없다며 “아마 어르신들이 즐기는 장르일 것”이라고 했다. 신기한 경험이 또 하나 추가됐다.
문자를 주고받다 보니 같이 이른 저녁을 먹자는 얘기가 나왔다. 오늘은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인데 할머니와 함께 있지 않아도 괜찮냐고 묻자, “이른 저녁은 간단히 밖에서 먹어도 되고, 지금 심심하니 나가고 싶다”라고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뭘 먹어야 할지 몰랐던 내겐 참 좋은 제안이었다.
그렇게 함께 이른 저녁을 먹고 (다른 사람과 있으면 예의를 차리느라 그런지 사진을 잘 안 찍게 된다. 결국 어디서 먹었던 지 찾아낼 수도 없다), 산책하며 대화를 이어가던 중 A가 불쑥 제안했다.
"이제 슬슬 집에 가야겠는데, 혹시 우리 할머니 만나보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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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그리고 불꽃놀이
당황함을 애써 감추며 갑자기 너희 할머니를 만나도 되냐고 하니까, A는 “할머니도 혼자 계시니 심심할 거야. 외국 친구가 찾아오면 분명 신기하고 반가워하실 거야”라고 말했다.
아… 그렇구나, 그럼 가도 되겠지? 나도 98세 할머니, 그것도 98세 외국 할머니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안고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A는 혹시라도 내가 금방 알게 된 사람을 따라가는 걸 불안해할까 싶었는지, 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신뢰를 쌓으려 애쓰는 게 보였다. 할머니에 대해 미리 소개해주거나, 동네 이곳저곳을 알려주는 식으로.
그렇게 도착한 할머니 집은 여느 친척 할머니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혼자 사시는 집이지만 정갈했고, 이미 내 방문을 예상했는지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탈린 시민으로서, 50년을 소련 국적으로 살아오신 할머니는 당연히 러시아어로 나에게 말을 거셨고, 내가 영어로 답할 때 A가 얘기했다. "할머니, 얘가 독일어도 조금 할 줄 알아요."
할머니께서 쑥스러워하며 웃으셨다. "아이고, 내가 독일어를 거의 다 잊어서 큰일이네, 그럼 서툴게라도 해볼까?" "아니에요 할머니, 제 독일어가 훨씬 더 형편없을 거예요." 결국 A가 러시아어-영어 통역을 해주며 대화가 이어졌다.
비록 통역으로 인해 말이 더뎠지만, 진심이 담긴 눈빛 덕분에 마음은 따뜻해졌다.
할머니께서 간단히 저녁을 준비해 주셨다. 사실상 말이 저녁이지 밤 9~10시에 먹는 건강한 야식에 가까웠다. 도와드리려다 오히려 등을 떠밀렸다. “손님이 주방에 들어오는 법은 없어. 집이나 구경해.” 집을 둘러보다 여권이 놓여 있는 걸 보고 “기밀문서 발견!”이라 농담했더니, A가 직접 펼쳐 보여줬다. 아하, 78년생이구나, 내가 추측했던 대로 40대 초반 맞네.
사진을 찍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곳에서 남긴 사진은 딱 한 장뿐이다. 저녁 식사 후 할머니와 함께 본 새해맞이 공연 러시아 방송이었고, 심지어 지금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러시아 지도자의 신년축사까지 생방송으로 보게 됐다.
대화 중 알게 된 사실 하나. 다가오는 1월 1일, 즉 한 시간 뒤에 할머니 99번째 생신이라는 것. 이런, 미리 알았다면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 왔을 텐데. 공짜로 얻어먹고만 간다니 낯 뜨거웠다. 11시 45분쯤 근처로 불꽃놀이를 보러 가기로 했으니 조금 일찍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슬슬 일어날 시간이 되자, 할머니께서 초콜릿 두 곽으로 내어주셨다. “줄 선물이 없는데 이거라도 맛있게 먹어.” 순간 외할머니가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혹여 티 날까 두려워 밝게 인사하며 집을 나섰다.
거리에는 불꽃놀이를 보려는 인파가 가득했다. 유럽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모아둔 광경은 흔치 않다. 대부분이 동영상이라 올리지는 않겠지만, 화려한 순간이었다.
불꽃놀이는 생각보다 짧게 끝났다. 명절 치고는 이른 시간이라 맥주 바에 잠깐 들렀다 집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내가 한 턱 내려고 했는데, A는 평범한 수제맥주 하나만 시켰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마지막 1분이었다. A는 맥주를 반쯤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나는 급히 내 잔을 원샷하며 핀잔을 줬다, “맥주를 남기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러자 A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좋은 맥주라도 굳이 다 마실 필요는 없어. 반만 마셔도 충분하다 느껴지면 그게 제일 좋은 거야.”
이렇게 평범한 말이 왜 나에게 그렇게 크게 다가왔을까?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나는 갑자기 결심했다. 2020년 1월 1일, 오늘부터 나는 술을 완전히 끊겠다. 햄버거에는 맥주, 고기 혹은 치즈에는 와인, 기분 따라 칵테일 혹은 양주… 이런 식으로 소량의 알코올 정도는 일상에 녹아 있던 나에게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술을 마셔야 하지? 술 없이도 충분히 행복한데.”
그리고 실제로 끊었다. 지난 2년간 직장생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 잔 정도 마신 걸 제외하면,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몸은 훨씬 가벼워졌고 돈도 아꼈다. 단 아쉬운 점은, 건강검진 결과 혈관이 또래보다 조금 딱딱하다는 소견. 역시 술이 몸에 남기는 영향은 불가역적이다.
호텔에 돌아왔을 땐 새해를 맞아 "일찍" 자려했는데 로비에서 러시아인들이 너무 떠들었다. 조용히 해달라고 프런트에 전화했더니 돌아온 답은: “오늘 새해예요, 이게 정상이에요.”
그렇게 새벽 4시까지 뒤척이다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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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원을 그리다
1월 1일 오전 10시 30분.
체크아웃을 하고 버스역으로 향했다. 이벤엔 다른 길을 택해 조금 다른 풍경을 기대하려고 했다. 교외 여행지는 너무 멀어 포기하고, 정오쯤 출발하려니 남은 두 시간 동안, 내가 뭘 해야 할까?
짐작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그 카페로 갔다.
혹시나 해서 대충 둘러봤지만 A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니지. 나는 이틀 전 앉았던 그 테이블에 다시 앉아 라테를 마시며 노트에 이것저것 적고, 리가에 도착하면 뭘 할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 일어나야겠다 생각을 할 무렵,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A와 그의 친구 한 명이 서 있었다. 서로 뜻밖이면서도, 왠지 당연한 듯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눴다. 나는 곧 버스를 타고 리가로 떠나고, A는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로 돌아간다고 했다.
마지막 인사는 악수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양권 문화 친구들끼리 하는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던 사이였는데, 악수가 의외로 편했다.
A는 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의 서랍 속에 태그를 붙여 넣어둬. 그런데 널 어디에 분류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어.”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어떻게 간단한 태그 하나로 나 같은 사람을 분류할 생각을 했냐고.”
그는 40년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 방식이 존재함을 이해하지만, 그 "시스템"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기에 이런 고민이 없다고 했다.
풍경을 감상하며 버스역으로 향하던 길, A에게서 문자가 왔다.
"궁금한 게 있어, 왜 다시 그 카페에 간 거야?"
나는 대답했다. "어디에서 시작을 했으면 거기에서 끝내야 그게 완전한 원으로 이어져 마무리가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별생각 없이 보낸 답장이었지만, A가 어제 절반 남긴 맥주로 나한테 준 영향처럼, 나의 이 말도 A에게 작은 여운으로 남지 않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