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안다고 믿었는데 낯설었다

ENTJ의 새해 첫날, 예고 없는 울컥함의 기록

by Katherine

이틀 연이어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렸다.

지난 한 해의 끝은 감사함으로 훈훈하게 마무리했고,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은 걷잡을 수 없는 감성으로 맞이해 버렸다.




2025년 12월 31일.


오후 6시, 2025년의 마지막 수업을 끝내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저녁 약속이 없다는 아쉬움은 잠시, 대신 여유롭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게다가 다음 날 아침엔 해돋이를 보러 가기로 한 친구들과의 약속도 있었기에, 평소처럼 과제를 하는 듯 마는 듯하다가, '그래도 2025년의 마지막 하루인데, 무언가 흔적은 남겨야지.'라는 마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마음에 드는 사진 몇 장과 함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2025년 역시, 늘 그랬듯 완벽에 가까운 해로 남는다.
아마 1년 뒤에도 비슷한 마음으로,
지나간 날들에 감사하며
다가올 한 해를 다시 기약하고 있겠지.

진실되고 일관성 있는 믿음직한 사람으로,
머뭇거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으로,
쭉 그렇게 성장하고 싶다.


그렇게 담백하게 시간을 보냈다.

2025년, 특히 서울대 MBA에 입학한 후의 하루하루를 가볍게 되돌아보며 흐뭇했고, 자정이 지나 친구들과 가볍게 새해 인사를 나눈 뒤 잠이 들었다.





2026년 1월 1일.


새벽 5시, 알람 소리가 정겹게 들릴 만큼 기분 좋은 컨디션으로 깼다. 그리고 그 텐션을 오전 내내 이어갔다.


해돋이를 보고, 소원도 빌고, 새해 아침으로 떡국도 먹으며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가, 오후 수업 때문에 집에 와서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곧장 학교로 향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서울대 MBA는 1월 1일에도 수업이 있다.)


조금 피곤했지만 네 시간 내내 이어진 비즈니스 머신러닝 수업을 열심히 들었고, 평소보다 더 활발하게 교수님과 동기들과 소통하며 마무리했다. 임시로 동기들과 저녁 약속이 생길 뻔 했지만, 컨디션이 살짝 나빠지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 아쉬운 대로 빠졌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는 순간, 예고 없는 울컥함이 몰려왔다.

몇 달간 글은커녕 짧은 일기조차 쓰기 귀찮았던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무언가 헤집고 나오는 느낌이었고, 나는 곧장 맥북을 열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글 아닌 글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23년 만에 새해 해돋이를 보았고,
23년 만에 새해 아침으로 떡국을 먹었다.
물론 예전처럼 색동저고리를 입을 수는 없고,
윷놀이는 몇 주 전 한옥에서 미리 즐겼다.

그때는 집 바로 뒤에 사과배가 열리는 산이 있어
조금만 언덕을 오르면 도시의 희미한 윤곽이 보였고,
그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다.
저녁이면 맑은 하늘 아래, 사계절 내내
천천히 하늘을 도는 별들을 올려다보곤 했다.

초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그 모든 건 추억이 되었다.

이제는 그 집도, 그 도시도 많이 낯설다.
하지만 나를 분에 넘치게 아껴주는 소중한 친구들과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며,
옛날의 아름다움을 지금의 삶에 비춰보며
틈틈이 행복을 느낀다.

결국 내가 살던 고향도,
그때의 걱정 없는 자유로움도,
지금의 내가 느끼는 감정으로 다시 정의된다.

글과 함께 쏟아진 건,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되지 않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미 한국살이 6개월 차인 내게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이미 한 달 전 어느 화요일 밤에도 정서가 한 번 크게 터진 적이 있었다. 그땐 학교 일이 잘 안 풀렸거나, 뭔가 슬픈 감정이 겹쳤다고 나름의 해석을 붙일 수 있었기에 납득이 가능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슬프지도 않은데, 이유 없이, 그것도 이른 저녁에 밀려든 이 감수성은 대체 뭘까.


고향이 그리웠을까?

어린 시절이 그리웠을까?

대체 무엇이 과거에 묻힌 채, 내 잠재의식을 조용히 하지만 세차게 흔들었던 걸까?


새해의 시작과 함께 예상치 못한 '과제'가 하나 생겼다. 이미 충분히 쌓여 있는 수업 과제들과는 다른, 나 자신을 풀어내야 하는 과제.

자기성찰에 소홀하지 않았다고 믿었던 내게 예고 없이 찾아온, 뜻밖의 도전이었다.





감성의 소용돌이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에, 오후에 친구가 보내온 MBTI 테스트가 떠올랐다. 다른 수업 교수님께서 주신 프린트물인데, 나도 MBTI 테스트 다시 해보고 싶다고 졸라서 받아둔 것이었다.


못 다 가라앉은 정서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60개 문항을 풀고 결과를 확인하니, 이렇게 나왔다.

E(10) I(5); S(3) N(12); T(12) F(3); J(14) P(1).


학부 때부터 ENTJ라는 같은 결과를 유지 중이다. 너무 뻔한 결과라 허탈하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휴, ENTJ와 이 미친 감수성의 조합을 어찌하면 좋을까?



--

p.s. 이 감수성만 쏙 빼고 차라리 A+를 맞을 수 있는 극단적인 효율성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1초 스쳐 지나가는 걸 보면, 영락없는 ENTJ가 맞긴 한가 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