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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Feb 24. 2024

박미라의 컬트 데드 헤드 렐름으로

완행열차를 타고 가자,

박미라의 컬트 데드 헤드 렐름으로


 

글 조주리


회화작가인 박미라가 지난 십여 년 이상 그려온 세계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의 정교함과 세밀하게 디자인된 어두움 속으로 관람객을 몰고 간다. 그가 그려낸 ‘저 세계’는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 세계'가 얼마나 안온한 것인가 하는 안도감을 선사한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이 꼭 공포와 불안으로 점철된  세계만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박미라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점액질의 우울감을 거둬낸 자리에, 자로 잰듯한  기괴함과 정량의 기발함이 알맞게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시네마틱’(cinematic)하다고 할 수도 있는 가공할만한 화면의 밀도는  위기에 빠진 등장 인물과 갖가지 크리처들이 한데 모여있는 옹골찬 기세지만,  그것들이 모여 특정한 서사를 향해 달려 가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풍성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기실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다는 의미다. 시퀀스를 이루는 이미지의 파편들은 그닥 친절한 해제를 갖지 않는다.  꿈 속에서만큼은  핍진했던 장면이었지만, 깨고나면 온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런 느낌이다.  그러니, 독해는 점차 미궁에 빠진다.


오가는 시공 속에 드문드문 마주쳤던 박미라의 작품들을 떠올리며, 성급한 결론이지만 나는 그가 특정한 서사만들기에 복무하거나 회화 매체에 대한 탐구 혹은 양식 개발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만은 아닐것이라 굳게 짐작하고 있었다. 종종 그림 그리기의 출발과 과정, 종착 지점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 대하여  느슨하게 답변을 줄 뿐인 박미라의 진심을 온전히 믿어서도, 의구심을 가져서도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 자신의 세계관을 표출할 수 밖에 없는 못말리는 충동이 있고, 그 속에서 자율적인 세계관이 움트고 유기적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어느 누구도 그보다 더 열심히 그리라고 부채질하거나 혹은 미진함에 대해서 비난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그저, 한 세계의 현현((顯現)이자, 작업자만의 비기(秘技)다.


적확한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작가만의 ‘렐름’(realm)이다. 즉 하나의 영토이자 지대, 세계관이다. 일평생에 걸쳐 수평, 수직, 사방으로 쌓아나가는 가상적 세계를 떠올려본다. 회화로부터 홀연히 몸은 빠져나왔고, '눈'으로만 존재하는 몸체는 어디듯 여행할 수 있는 정찰대처럼 화면 바깥의 궤도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중세 시대의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자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미물로 분하여 자신만의 ‘어트리뷰트'(Attribute), 즉 자신만의 상징을 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개미일까, 밧줄일까,  그도 아니라면 나무 사이로 보이는 개구리의 눈알일 수도 있겠다.  


양식적 측면에서 박미라의 작품에는 누구든 그의 작업으로 인지할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이 있고, 반대로 어떤 이들은 그것 또한 일종의 클리셰라고 간주할만한  일관된 시각성이 동시에 발현된다. 인간적 필체가 드러나는 드로잉과 음영으로 처리한 인물과 풍경의 감각은 중세풍의 종교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흑백의 세계에 존재하는 정물과 인물, 자연이 이루는 이질적 풍경은 격랑으로 가득한 불온한 세계,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는 전치(轉置, displacement)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심판과 처벌, 속박의 대상은 주로 인간이지만, 인간의 신체 또한 생명력을 상실한 파편이나 껍데기로 부유한다. 좀처럼 빈 틈을 허용하지 않는 화면의 밀도에도 불구하고, 박미라의 회화가 지나치게 무겁지 않게 다가오는 점은 ‘중심’이 없는 부력과 ‘전체’를 가정하지 않는 탈구조적 시각성에 기인한다.


아마도 20세기 초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유사하게 보아왔던 사물의 이미지나 신경증적 신체, 망상적 세계관이 조금더 현대적으로 각색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 안에 담긴 히스테리아가 그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 안에서 작가가 다루는 탈 억압의 기제와 미술 언어를 대리한 이미지의 탈주방식은 분명 다른 루트를 통해 모의되고, 실행되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박미라의 그림에는 작가의 국적이나 인종, 사회 문화적 계급의식과 같은 아비투스(habitus)가 대체로 결여되어 있다. 특별히 한국적이지도, 서구적이지도, 고상하지도, 천박하지도 않다. 바로 그런 점이 그의 작업을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일도 지 모른다.  


그의 작업으로부터 ‘컬트’(cult)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 말이 정확히 어떤 용례로 사용되는지 신중하게 생각할 겨를 없이, 그저 컬트적이라고 느낀 바 있다. 경우에 따라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는 이 말이 적어도 예술 안에서는 '위반'을 향한 절대적 충동과 매혹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작업 속에는 춤추는 죽음의 도상과 생명을 붙잡기 위한 사투의 장면들이  동시에 쟁명한다. 연약함을 궤뚫는 날카로운 것, 어리석음을 단죄하는 단호한 존재가 있을 것 같지만, 인간계가 규정한 '사필귀정' 따위는 없을 논리 없는 세계를 '컬트'라는 말로 포획하는 일이 가능할까.

 

다만, 생각해 본다. 인본주의 혹은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먼 저편에서, 각자의 인격이나 인간적인 사정은 손쉽게 거세되어 버린다. 커다란 나무와 별빛, 일렁이는 파도, 어디든 기어오르는 덤불의 줄기가 오히려 지배력을 갖는다. ‘우화’라는 단어조차 사치일 정도로 인간은 어리석은 미물이요, 다가올 처분과 심판을 기다리는 속박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서 낭만주의적 자연관을 읽어낼 여지가 있다면,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 있는 대자연의 심판과 그 속에서 위태롭게 나부끼는 ‘반-지성’의 존재 사이의 극단적 대비에 있을 것이다. 생동하는 삶보다 위대한 것은 죽음 너머의 저쪽 언덕, 피안(彼岸)일 것이다.  


박미라가 부단히 중계하는 화면, 이를 통해 증언하는 세계는 어떤 곳인가. 조금만 들여다보면 누군가에게는 훤히 보이는 작은 구멍으로, 얇은 장막 사이로, 날카로운 틈새로 저 세계가 이어진다. 그것은 오랫 동안 회화에 대한 유비였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화가의 사유에 대한 이야기였다. 또한 사물의 이데아와 그것의 모사본이 작동하는 극장의 세계, 오늘날 회화를 상품으로 간주하는 자본의 세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진동시키는 창조적 혼돈과 오염에 찬동하는 일군의 정신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작품 곳곳마다 뚫린 지점과 그것을 관통하고, 꿰맬 수 있는 도구를 심어 둔 박미라의 전술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가며 그 둘의 평행 세계를 웅숭깊게 바라바고, 짓궂게 표현하는 일일테다.  그것이 그만의 ‘컬트 데드 헤드 렐름(realm)’일 것이다. 정말로 그런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박미라를 생각하며, 창가 가장자리에 드리워진 커튼의 얕은 주름을, 그 사이로 펼쳐진 행로를 응시한다. 렐름은 어디에나, 어떻게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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