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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Feb 24. 2024

만찬

나와 너의 우리의 그들의 맛 - 성북문화재단 기고

만찬, 나와 너의 우리의 그들의 맛 




글 조주리




1987년에 발표된 영화 <바베트의 만찬(Babettes gæstebud)>은 미식을 경애하는 많은 이들이 손에 꼽는 수작으로,  나 역시 일상의 한 켠이 허기지다 느낄 때 영화를 떠올리곤 한다. 입안 가득 들어찬 ‘만찬’이라는 짧은 단어를 내뱉는 순간 성대한 식사에 담긴 맛과 멋이 풍부하게 감싸는 기분이 든다.


영화의 도입부는 지루하고 버석하다. 그 시간을 견뎌낸 보상으로 엔딩 부분에 가서야 복잡미묘한 여운과  환희가 주어진다. 대부분의 아름다운 시와 연주, 공연과 미술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때는 1871년, 덴마크의 외딴 어촌마을, 주인공 바베트는 오직 검약과 절제만을 추구하는 자매인 마르티나와 필리파의 살림을 도와주는 여인으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프랑스로부터 도피해온 인물이다. 어느 날 복권에 당첨된 바베트는 자매와 동네 사람들을 위한 단 한번의 프랑스식 만찬을 대접하기로 결심한다. 탐식을 죄악으로 여기며 최소한의 음식만으로 지탱해온 이들에게 바베트의 만찬은 환영받지 못한다.


영화에 관한 기억 조각이 이리저리 어긋나 버렸지만 바베트가 차려낸  코스 요리의  진귀함에 온 마음으로 저항하던 이들이 아름다운 요리에 하나 둘씩 함락당하는 과정만큼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시간이 지나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점이 있다면 상기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식탁의 흐름과 사람들의 미각을 지휘하는 바베트의 리더십과 그것을 가능케 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다. 당첨금으로 받은 만 프랑을 고급 식재료를 구하는 데 다 써버린 것이 말미에 밝혀지면서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한 주인공의 처지가 안타깝기도 하지만, 실로 예술적인 영웅담이 아닐 수 없다. 오직 ‘맛과 멋’으로 상대를 흐물텅하게 녹여버리는 거나한 식극 아니겠는가.    


흔해빠진 비유일테지만 전시를 만들거나 새로운 기획을 구체화하는 일은 요리사의 일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뭉툭한 것들을 다듬고, 소스를 졸여내고, 음식의 간을 맞추고, 멋지게 차려내는 일은 모든 장르의 고도화된 노동과 닮아있다. 누군가는 재료가 갖는 희소성과 신선함을 분별하고, 안전한 맛과 낯선 맛을 블렌딩하고, 색감과 비례를 판단하는 속에서 최적의 맛과 차림새를 구성해 갖춰나간다.  그에 더하여 적정한 제목과 풍부한 해제를 덧붙이는 노력, 그러한 노력을 알아봐 줄 세심한 이들과 연대를 다지는 일까지 모두 이상적인 기획자의 요리, 요리사의 기획이기도 하다.


전시기획자가 되겠다고 홀로 선언하는 순간, 감히 그런 기획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기승전결이 있는 입체적인 코스를, 그 속에 하나 하나 이유있는 맛과 파격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물론,  내내 갈팡질팡이었다. 이상은 높았지만 그에 비해 역량이 부족한 탓이다. 하고싶은 일과 할 수있는 일 사이를 왕복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만이 위안이 된다.


늦깎이로 전시 기획에 뛰어들며 가장 신경쓴 부분은 기존 전시 문법의 양식과 업계의 어휘를 되살피는 것이었다. 참신한 전시를 기획하기 위해 선배들의 레시피를 학습하고, 이리저리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일에 골몰하기도 했다. 과정이 울퉁불퉁하여도 그 시간을 견디고 하나의 시공을 쏘아올리는 일은 축제적 순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취감이 아주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샘솟던 아이디어도 차츰 고갈되고 새롭다 확신했던 일이 전혀 새로울 것 없이 느껴지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묵묵히 일해온 업계 선배들의 노련함에도 이르지 못하고, 발빠르게 쫓아오는 후배들의 당찬 기세도 수용하지 못하는 사이, 기획은 엄연한 일이자 직능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열심히 기웃거리면서도 회피하고, 관조자의 지위를 즐기며 때로 격하하던 미술과 기획 일이 어느덧 생활의 축이자 삶의 중심 영역이 된 일 말이다. 미술이 두려웠던 까닭은 불투명성과 냉담함 때문이이었고 외면했던 이유는 전시라는 제도로는 미술의 불가해함을 온전히 전달하고 작가와 관객을 매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진단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여전히 전시 만들기의 어려움에 절망하고, 미술의 무기력에 대해서 분노하고, 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분열과 예술 행정의 편협함에 고개를 젓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일을 붙잡고 있다. 예술 작품의 비생산적 발화 방식과 전시 제도의 일시성은 세상의 수많은 일들 가운데 내가 이 일에 헌신하는 근간이기도 하다. 삶의 모든 영역이 그렇겠지만, 우리가 '일'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구체적 어려움과 곤란함, 그리고 그것을 온몸으로 대면하며 새로운 방식을 창안하고 끝내 해결에 이르는 과정에서 배우는 것들이 적지 않다. 나에게는 그것이야 말로 살아있는 지식이자, 세계를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생의 철학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긴 시간 매달려왔던 미술에 대한 일방향적인 추앙과 신비화, 그리고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이 조금씩 허물어졌고, 때로 무신경하게 격하해온 것들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꿔오기도 했다. 


나에게 미술이란 오랜 시간 개인적 호기심과 즐거움에서 파생된 취미의 영역이었다. 동시에, 보이는 모든 것을 탐문하고 곱씹어야 할 강박의 자극제이며, 만나야 할 세계의 모든 것이 얽혀 있는 관계망이며, 지독한 열등감과 자부심을 건드리는 악당이기도 했다. 잃을 것이 없는 냉정한 관람객에서 모든 책임을 져야하는 기획 당사자가 되고, 때로 창작자의 대리인 혹은 작품의 관객 사이의 매개자로 빈번하게 위치 전환이 이뤄지는 동안 겪었던 감정의 총화는 담백한 언어로는 묘사하기 힘든 신파에 이르게 되었다.


어느 날 결심한 바 있다.


기획이 힘에 부칠 때 미련없이 그로부터 멀어져 있자. 관람객의 위치로 돌아가 그날 본 전시의 한 구석이라도 칭찬할 것이 있다면 기분좋게 전시장을 나설 것이다. 그러다 습관적인 관람으로부터 그 어떤 긍정적 자극도, 부정적 공격도 받지 못한 날이 계속되면 그것마저 끊어 내기로 한다. 누구에게나 잠깐의 허기와 일시적 해독이 필요한 것처럼, 최후의 보루로써 이미지도 영상도 없는 세계, 장식과 메타포가 배제된 세계로 피신하기로 한다. 그곳에서 나는 요즘 유행하는 시인의 시집을 따라 읽고,  금요일 늦은 밤 황덕호의 재즈수첩을 청해 듣고, 치장과 설득이 빠진 문장들을 종이 한 가득 써내려 간다. 그러다보면 조금은 불투명하고 냉담해서 더 매력적인 그런 존재가 그리워진다.


어김없이 미술이다.


반겨주지도 않건만, 불친절하고 응달진 구석부터 조금씩 살을 붙여 서사의 뼈대를 세우고, 저 먼 세계의 것들을 엮어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지리멸렬한 당김과 밀어냄의 반복 속에서도 축제의 순간은 ___ 온다. ‘불현듯’이라고 쓰고 싶지만 그것은 ‘기어이’ 만들어 내는 부산스런 일이다. 내가 가야 할 곳은 기어이 인공적이고, 강박적이고, 떠들썩한 세계임에 분명하다.  


만찬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미술에 대한 짝사랑과 가끔씩 서로 아름답게 공명하는 것 같은 착각, 전시 개막 직전에 모든 것이 기적적으로 완성되는 놀라운 경험, 한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전시의 유한함에 대한 기억은 홀로 누리기 아까운 특별한 맛이다. 나와는 취향도, 이념도 다른  어떤 누구와 공유해야 제맛인 한시적 메뉴다. 

더욱이, 우리가 사는 이 도시는 지치는 법 없이 매일, 매주, 매달 정다운 초대장을 보내온다.


시각 예술이 지닌 달콤한 화사함 끝에 따라오는 씁쓸함과 짠내는 오늘 하루를 이상하리만치 아득한 저 세계의 구석으로 끌고 간다. 어떤 것을 맛보기 전과 완전히 달라진 감각과 기준으로 세상을 음미하게 한다. 뜨끈하게 끓여낸 바다거북 수프와 바삭하게 구워낸 메추리 맛에 이미 눈떠버린 미맹들의 만찬이 영원히 화석화되어 마음 속에서 무한히 재생되는 것처럼.  내가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꼭 그랬으면 좋겠다. 


나와 너의 우리의 그들의 어떤 것을 담아 푹 고아낸 깊고 신선하며, 질기고 바삭한 그런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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