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 흐르는 거울처럼 정지된 물처럼
글 조주리
임소담을 생각하며 나는 ‘우수’라는 말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낱말이다. 무엇인가에 대하여 염려하는 마음 한 자락(憂愁), 비 온 후에 불어난 물 웅덩이와 그 위로 일렁이는 것들의 유격(雨水). 작업하는 모습과 그속에 펼쳐진 풍경이 꼭 그런 것만 같다.
하나의 낱말이 불러일으키는 상념의 연쇄 과정에는 어떤 이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높낮이와 멈춰진 것 사이에서도 파동을 느끼는 민감도에 닮아 가고픈 마음이 함께 한다. 가냘픈 그 마음에 의지하여 임소담의 작업에 투영된 것들과 그 안에 담길 수 없는 세계의 누수에 대하여 동시에 생각해 본다. 화면에서 멀어지는 일로부터 그의 작업에 다가서는 일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미지를 독해하는 해상도를 낮추는 대신 삶의 모호함을 풍부하게 조망하는 일이 될 것 같다. 물의 스펙트럼을 유심히 살피는 일처럼 말이다.
한참만이다. 크고 작은 캔버스로 채워진 작업실의 밀도, 회화 작업으로만 꾸린 전시의 구성 또한 임소담에게도 오롯한 자리겠다. 세라믹과 회화. 혹은 단단하게 만드는 불의 힘과 묽게 만드는 물의 유순함. 서로가 서로를 대체하거나 전략적으로 보완하는 관계도 아니지만, 지금의 시간은 무엇인가를 만들고 채우는 일보다 그리고, 띄우고, 가라앉히는 일이 퍽 어울려 보인다.
생각해보니, 무엇 하나 우연에 기댈 수 없는 일 같다. 캔버스 위로 온통 개인의 결정과
움직임의 궤적이 알리바이로 남는다. 작업 과정에서 모종의 우연이 작동했다면, 그 또한 미필적 고의였을 것이다. 도시에서 한 발 멀어짐으로써 조금 더 자연에 가까운 자연으로 들어간 것이 작가의 우연한 계획이었던 것처럼. 주위에 자연 풍경과 도시의 흔적, 원 주민과 이방인의 삶이 불균질적으로 흩어져 있는 환경은 일종의 폐쇄적 풍부함을 제공한다. 때로, 걱정할 것이 없어 걱정인 삶의 단순함이 작업의 복잡성을 만들어내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올해의 작업이 꼭 그래 보인다. 붙잡고 있던 삶의 잔 가지들을 흘려보내고, 필요한 것만 남긴 순간에 찾아오는 평온함이다. 밀려드는 계절을 하나 둘 통과하며 임소담이 응시한 풍경에는 물, 풀, 나무와 같은 자연 요소와 인물, 집을 연상시키는 정도의 형체만이 남아있다. 그저, ‘물그림’이라는 제목이었다 해도 수긍했을 것 같다. 그려진 대상은 명확한 편이지만, 각각의 의미나 상징을 따져 묻기에 대부분 익숙한 정경이다.
기법의 핍진성을 보자면 물결의 표현이나 투영된 효과를 리얼하게 묘사한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물거울 연작이 흥미로운 부분은 임소담이 작업을 통해 회화에 던지는 자기 반영적 질문과 관객에게 내미는 수수께끼에 있다. 물론, 단순한 감상만으로도 전시는 충분히 우호적인 시간을 선사한다.건조한 안락함으로 채워진 백색 전시 공간에서 재회한 임소담의 그림들은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 그날, 스튜디오에서 보았던 풍모와 또 달라진 인상과 배열로 다가온다. 프레임 안에서는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파편으로 부유하지만 군집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균형감을 준다. 애써 환한 곳을 그린 것 같지 않은데도, 밝고 아름답다. 전시장 안에서 몸으로 감각하는 체험이다.
그러나 미완 단계에서 마주한 작업에 대한 반응은 미적 감상보다는 좀 더 순진한 질문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물감과 붓과 같은 화구, 드로잉이나 텍스트 더미와 같은 다양한 부산물이 공존하는 제작 과정에서 드는 단편적 생각이다. 예컨대, 작가가 보고 느낀 세계가 회화로 옮겨오는 수행 과정에서 구도와 형태를 잡고, 색을 쓰는 과정에서 어느 만큼이 즉흥이고, 어느 만큼은 연마된 결과물일까 하는 초보적 질문. 혹은 그러한 의식이나 계산이 작업 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가 유의미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 어느 수준의 자기 인식과 탈구 과정을 거쳐야 몸에 익어버린 작업 논리를 파괴하면서도 여전히 한 세계에 단단하게 정박할 수 있는가 하는 추상적 논의다. 상대적으로 리서치 과정과 제작 방식이 명확한 듯한 회화 작업 안에서도 끝내 입증 불가능한 무수한 전제와 접근방식이 작동할 수 있음을 여전히 생각해 보는 중이다. 회화가 참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거듭 느끼는 지점이다.
한편, 전시를 본 후에는 회화의 발생과 제작과정보다는 정서적 감응과 감상의 역동에 대해서 반추해 보게 된다. 간결한 제목과 캡션 외에는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두지 않는 의도적 뭉툭함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기울기에 대한 반응이자, 관람 이후 한 동안 잔상을 남기는 작업의 심리적 영속성에 대한 질문이다. 현대 미술이 갖는 정서적 차가움이나 해설의 난해함, 창작자에 대한 단편적 정보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서사성이 짙은 작업보다 단순하거나 모호한 작업들이 다양한 감정을 촉발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회화는 ‘쿨’ 미디어의 전통적 속성을 지닌다. 보는 이의 몸과 마음의 수용 상태, 관람 경험을 변수 삼아 작업과 공명하는 방식 또한 매번 달라진다.
나에게, 흰 벽에 나란히 걸린 작업과 작업 사이를 거닐며 돋아났던 감정적 반응은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연민과 염려, 슬픔, 그리움에 가까운 것이었다. 흐릿해진 형체를 자의로 보간(補間)해 내야 하는 과제 앞에서 별안간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을 기억해 내게 되는 경험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객관적 분석에 다가서지 못한 채 준비없이 점령당한 감정은 임소담이 의도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일지도 모른다. 물의 매질과
촉지적 감각을 시각화하려는 과정의 일환이었거나, 과거 작업에서부터 입증하고자 했던 특정한 회화 프로세스를 재확인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겠다.
작가가 창조한 환영이 보는 이의 망막을 거쳐 대뇌 깊숙한 곳에 도달한 순간까지, 무엇이 어느 쯤에서 어떻게 개입되는지를 추적하거나, 가능한 변인을 목록화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다. 작가가 세계의 한 부분을 마주하며 그의 마음 속에 남은 물질적 잔영과 기억을 화면으로 가득 떠내는 일과 그 불가해한 과정을 통해 도달한 회화적 세계를 감각으로 맞이하고, 자신만의 경험으로 옮겨오는 일 사이에 바닷물처럼 깊고 넓은 유속이 존재한다. 매 단계마다 표류와 분산, 단절이 있다.
물거울은 이중, 삼중의 트릭이다. 그리는 자의 심연이란 언제나 절반 정도만 대상을 투영하는 강물처럼 검다. 잘 그려진 세계는 때로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아 의뭉스럽다. 전시가 막을 내리고 나서 한 참 후에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운동성을 갖는 물의 움직임은 기어이 수평에 이르고자 하지만 거울 표면처럼 완벽한 평면에 닿을 수 없고, 매끄러운 거울은 흐르는 물처럼 깊이와 온도, 방향을 갖기 어려운 것처럼, 물 거울은 양립할 수 없는 세계 혹은 중간적 상태처럼 느껴진다. 세계의 입체를 회화적으로 사유하고 표현하는 이들의 마음 지도가 그런 것일까.
다행인 것은 그림 앞에 선 사람들 또한 그들이 세계에서 획득한 지식과 경험을
작동시켜, 눈으로 매료된 것만을 따라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시각적인 정보를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고, 그려지지 않는 부분을 갈파하려는 신중한 욕망을 갖고 있다는 점은 공평한 일이다. 생각해보면 둘은 하나의 '쌍'이다. 물에 비친 세계와 실재하는 것이 둘 다 각자의 진실인 것처럼 말이다.
물결에 어린 흐릿한 형상을 화면으로부터 건져내 또 다른 지대에 투영해본다. 옛 집, 아버지, 돌탑, 물 속 어딘가 침잠해 있을 또 다른 기억들을. 임소담의 작업이 흘러가는 유유한 길목에서 눈에 밟히는 부분만을 겨우 조망해본다. 그에게서 출발한 작업은 어제 유심히 바라보았던 하루의 반영이었고, 오늘 지어낸 글은 작가가 남긴 것들을 붙들며 만들어진 또 다른 부산물이며, 전시를 본 이의 기억과 공명하여 오직 당사자에게만 의미로 다가오는 이미지 몇 조각으로 내려 앉을 일이다. 그것이 생동하는 자연에 대한 찬미일지, 오래전 상실한 세계에 대한 추억일지, 무엇인가를 떠나 보내는 진혼의 과정일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또한 임소담이 희미하게 설계한 예술의 여정이라면,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을 이 안전한 시나리오 속에서 그들은 혹은 우리는 지금 서로의 일부만을 투영해보며 길고도 깊은 스펙트럼을 횡단하는 중일 것이다.
깊게 고인 삶의 우수 위를, 예술이라는 삶의 거울을 즈려 밟으면서.
그런 줄도 모르고.
Fading face(5) 2023_Oil on canvas_53x45.5cm
Missing people (the pink shirts) 2023_Oil on canvas_72.7x60.6cm
Wish tower 2023_Oil on canvas_112x19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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