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종의 Free Style,
지나치게 공들이지 않는 선에서
글 조주리
박경종의 작업 방식은 ‘프리 스타일’. 말 그대로 특정한 형식이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무언가를 진행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규범화된 세계를 알지 못한다면 그로부터의 탈주나 파격 또한 성립될 수 없다는 점에서 프리 스타일이라는 말 또한 역설을 내포한다. 동일성을 파괴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현대미술의 세계에서 작업의 자유로움을 간파하는 일은 예술가가 감당해야 할 필연적인 모순,혹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유로움과 계획 없음의 미묘한 한 끝 차이에 대해서도 말이다.
작업의 면면은 작가의 풍모와 기질과 맞닿아있다. 이 당연한 인과적 사실로 인해 우리는 바닷가 모래알 만큼이나 드넓게 펼쳐진 작업들을 섬세하게 감별하고, 비슷한 규칙으로 탄생한 것에 대하여 각각의 서사와 레이블을 붙여 인식하기도 한다. 가령 박경종의 작업에 대하여 ‘신중한 즉흥성’, ‘억제된 경직성’, ‘느긋한 집요함’, 이런 종류의 꼬리표를 달아 놓았을 것 같다. 그런 말들은 개별 작업의 형식적 특질을 지시하지 않지만 작업을 촉발시키고, 과정을 컨트롤하는 미적 태도나 직관적 움직임 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언어로 포획되기 어려운 것이 시각 이미지다. 화면을 구성하는 작가의 무의식적
에너지와 운동 감각에 감응하며 창작의 시간을 흡수하는 것이 관객의 몫이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박경종의 작업에 감응하는 포인트는 회화적 양식이나 테크닉의 발현 보다는 이미지의 탄생과 변성을 수용해 나가는 작가의 본능적 감각과 ‘기체’와도 같은 가붓하고 임의적인 태도에 있다. 질료를 문지르고 이미지를 쌓기 보다는 사방으로 분사되고, 좌우로 번지고, 상하로 흐르는 감각이 분방한 박경종의 회화 작업은 온전한 추상과 손끝에 남아있는 디자인 감각 사이를 오가며, 매번 다른 플레이로 흐르는 즉흥 음악을 닮아 있다. 고체의 견고함보다는 액체의 점액질에 가깝고, 그보다는 기체의 ‘라이트’함에 가깝다.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를 붙잡고 어느 방향으로든 쓸려 갈 준비가 된 관람객이라면, 작품이 지닌 질량감이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몇 번이 계절이 바뀌는 동안 박경종의 스튜디오에는 작업의 진행 경과를 판가름 하기 힘든, 서로 다른 풍의 작업들이 그득하다. 가벼운 드로잉부터 밀도 높은 작업까지, 엄지손톱만한 작업부터 벽을 가득 채우는 캔버스까지 작가의 머리 속과 작업의 스펙트럼을 축도한 모양새다. 어떤 것들은 제법 집요하게 붙든 티가 나고, 또 다른 것들은 여분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미완 상태에 놓여있지만, 서로 다른 세계가 부유하며 공존한다. 지나치게 공들이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시간을 무심하게 통과하고 있다
최근 작업은 주로 페인팅이다. ‘주로’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근거는 작가가 그간 보여준 매체적 다변성과 확장성 때문이다. 회화 작업을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 제작과 입체적 설치, 퍼포먼스 등의 작업을 두루 거쳐온 그간의 포트폴리오를 떠올릴 때 요즈음의 작업은 좀 더 평면에 집중된 단순하고 편안한 형세다. 힘을 뺀 듯 보이는 근래의 작업들은 작가의 즉흥적 제스추어와 연마된 오토마티즘을 동시에 반영한다.
화면은 작가가 제어해야 할 대상이자 목표점이기 보다, 그 자체로 플랫폼이 되어 이미지가 이미지를 낳고, 서로 서로 밀어내고 공간을 중첩시키며, 떠오르고 가라앉는 시차를 통해 서로의 운동감을 유지한다. 입증해 내기 쉬운 일은 아니다. 화면 속의 자율적 논리를 그토록 꿈꾸었던 모더니스트들도, 서로의 눈을 가리고 그림을 이어 완성하려던 초현실주의자들도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한 세계이니 말이다. 그 상태에 도달했을 때 숨가쁜 환희와 자유를 만끽하는 자가 있다면 오직 작가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상태란 반쯤은 자기기만이고, 반쯤은 선명한 진실일 것이다.
잠에서 깨기 전 손으로 만져지던 바닷물의 온도와 파도의 질감처럼 말이다.
올해 개인전에서 박경종은 ‘추상’ 계열의 신작들을 일시에 선보인다. 작업 전후의 역사나 관계항을 살피는 일보다 선급한 것은 작업이 지닌 풍부함 안으로, 생동감의 구조로 접근하는 일이다. 전반적인 실천의 향방을 ‘유희’의 지점으로, 놀이의 부산물처럼 몰고가는 박경종 회화 세계에서, 가장 비서사적이며 반 자전적인 작업 실천은 추상 시리즈다. 일련의 작업에 대해서 박경종은 ‘추상 회화놀이’라고 명명한 바 있 있다. 예의 ‘이발소’ 그림이나 ‘극장’ 그림, 혹은 ‘민화’ 풍의 그림에서 명징하게 보여주었던 리얼리즘적 접근과 시각문화 연구 기반의 작업들과 변별되는 추상 회화 시리즈들은 외견상 오늘날 제도권 미술계와 시장에서 환대받는 서구식 추상 표현주의 혹은 색면회화의 뉘앙스로
수렴된다. 대상을 재현하지 않으며, 전경과 배경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 올-오버(All over) 상태의 균질성을 띄기 때문이다. 선과 면이 만들어 내는 즉흥적 감각과 색이 갖는 정서적 표현은 특정한 문화사적 도상이나 이념적 좌표를 갖지 않는다. 리듬과 멜로디로만 구성된 음악처럼 화면 안에서 작가가 속한 계급성이나 민족성을 가늠하기 어렵게 한다.
전시된 작업들은 대체로 유추 가능한 도상이나 텍스트의 흔적이 사라지고, 자연 풍경이나 인물의 파편 정도로 느껴지는 요소들만 살린 모호한 선과 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양운동>이라 이름 붙인 몇몇 작업과 아직 적확한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 신작 일부를 미리 살펴보며 작가의 창발(創發)이란 기획되고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무엇이든 뱉어내고 흘려보낼 준비가 된 이미지 창고의 비옥함 속에서 새로운 작업의 전기는 말 그대로 돌연히 출현하는 것, 비구름처럼 거세게 몰려오는 것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그렇지만, 극단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가 내놓은 그림들은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우리를 매료시키는 불가해한 감각은 화가의 유년기와 우리의 장년기, 그의 감각과 나의 이성을 매개하는 중간적 상태에 지나지 않을 수있다. 아직도 말끔히 정리되지 않은 그의 두뇌 활동의 단층 혹은 단면 일 수 있다. 여지까지도 꽤 말캉해서, 약간의 자극으로도 순간 순간 생성되는 만화적 상상력, 손쉽게 각색되곤 하는 꿈의 기억들, 온갖 사물에 투영된 자기 자신의 모습일 수 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한
지점을 임의로 겨냥하여 제목을 짓고, 문장을 생산하고, 감상을 지어내는 것 뿐.
허공을 맴도는 새의 시점으로 박경종이 그려낸 세계의 높낮이를 가늠해 본다. 과감함과 불안함이 교차하는 시선 끝에 걸린 세계는 마냥 광활하지도, 자유롭지만도 않다. 진동하는 잔영과 잔향 속에서 상승일지 하강일지 모를 선분과 색면과 형상이 일렁인다. 어쩌면 바다 속 깊은 곳으로 직진하며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반쯤은 무엇인가에 이끌려 들어가는 프리 다이버의 궤적처럼, 그 역시 어딘가의 회색 구간을 자연스럽게 돌파하는 중일까.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실바람처럼 스치우고, 밤하늘 잔별처럼 휘감는 작업의 리듬과 운율을 온몸으로 받아치고, 필요한 만큼 흡수하며 작가도, 나도, 우리도, 그들도 각자의 자유를 누리기를 바라본다.
너무 애쓰지는 않는 선에서.
부양운동 2번, 2023_72.7x60.6cm_Acrylic on canvas 부양운동 3번, 2023_60.6x72.7cm_Acrylic on canvas
부양운동 4번, 2023_72.7x60.6cm_Acrylic on canvas
출처: 박경종 展
Hover Maneuver 부양 운동
vohm gallery 봄화랑
2023. 11. 23(목) ▶ 2023. 12. 21(목)
https://www.artmail.com/db/2023/20231123-parkkyungjong.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