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Review
The Sea What We Want To See
Billytown Gallery, Den Haag, NL
1.11- 21.12 2024
Curator: Heeseung Choi, Billytown
Artists: Hyree Ro, Jiyoung Yoon, Eunsae Lee
2024년 초여름의 서울과 늦가을의 헤이그. 멀리 떨어진 도시지만, 운이 좋게도 두 곳에서 하나로 이어지는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첫 기억은 《물보라를 일으켜》라는 청량한 제목이었고, 네덜란드에서 만난 두 번째 전시에서는 The Sea What We Want to See라는 제목이 돌출되어 보인다. 다시 살펴보니, 나란히 병기된 두 표현이 각각의 리듬과 심상을 전달하며 작은 물보라와 거대한 대양의 대비를 이루는 것 같다. 지시하는 바가 미묘하게 다른 언어의 틈 사이에서 맨 처음 건져 올린 감각은 바다의 무게와 밀도, 촉감과 온도, 운동성과 같은 물리적인 성질의 것이지만, 가까이서 살핀 전시의 뉘앙스는 물에 대한 시각적 재현과 직접적인 설명을 배제하고 있다. 공간은 어딘지 메말라 있고 작업들은 한바탕 물이 휩쓸고 나간 자리에 나부끼고 있거나 매달려 있는 인상으로 펼쳐져있다. 서사의 명료함과 시각적 풍부함을 일부러 절제하는 듯한 까닭은 이 전시가 ‘물’ 혹은 ‘바다’와 같은 물리적 대상 혹은 관계적 지형을 묘사하는 대신 물의 형질이 매개하는 공간과 비공간의 경계면에서 개인의 내밀한 기억과 자의적 해석에 기댄 작가들의 서정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연약함이야 말로 힘의 세기를 잘 드러내는 장치라고 해야 할까. 도시의 깊은 골목 안쪽, 지나치기 쉬운 작은 섬처럼 서 있는 전시의 지형을 기억하며, 밀려왔던 관람의 시간을 잠시 붙잡고 곱씹어본다.
찬 계절의 헤이그는 해양 도시 특유의 낭만적 경관이나 북유럽 어딘가를 상상하며 떠올렸던 절대 고독의 풍경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조금만 나가면 바다가 지척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내륙으로만 이동하는 숨 가쁜 여행객에게 이 도시의 정경은 돌과 철, 자동차, 그리고 수평선 위로 완만하게 솟아오른 내륙의 모습이다. 바다라는 관념이 대체로 원경의 것이고, 미지의 것으로 낭만화되어서일까. 지난번 서울에서 보았던 전시에서처럼 도시 안쪽에서 끌어당긴 바다와 물덩이들은 생경하게 다가온다. 그러니 이제, 전시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대신, 전시 이전에 무엇을 보지 않았는가로 질문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어디에 물이 있는가를 궁금해하는 대신, 도처에 물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반문해봐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독히도 길고 습했던 서울의 날씨와 축축한 찬 바람이 휘감아도는 헤이그의 풍경을 잇는 물줄기를 생각해 본다. 대지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물줄기, 강가의 안개, 바다의 헤일 같은 것이다. 생명을 배태하고, 사람을 띄우고 가라앉히며, 돈과 에너지를 실어 나르며, 서로를 고립시키는 물로부터 드넓은 문명사적 상상과 해석을 던져봄 직하다.
한편, ‘물보라를 일으켜’라는 한국어 제목은 흩어지는 잔 물방울을 뜻하는 물보라의 이미지는 K 팝 걸 그룹 중 하나인 ‘오마이걸’의 히트 곳인 돌핀(Dolphin)의 산뜻한 후렴구를 떠올리게 했다. 물보라라는 말의 모양새에 요동치는 청춘의 서정과 찰나의 에너지가 묻어난다. 반면, ‘sea/sea’라는 동음이의어로 명시된 또 다른 제목은 바다가 표상하는 사회문학적 함의를 조금 더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 제목만으로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물방울의 연약함과 지구의 해양역사 속에 존재했거나 물밑으로 꺼진 격랑의 어두움을 대비하는 일은 어쩌면 과도한 상상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네덜란드라는 양자적 구도 안에서 기획된 교류 전시에서 ‘바다’ 혹은 ‘물’의 이미지를 활용한 점은 동떨어진 두 장소를 서로 호명하고, 상이한 출발점을 지닌 작업의 서사를 이어나가는 틀로써 꽤 유효한 출발점이었음에 동의한다.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결국 수평에 이르는 물의 속성과 그럼에도 예측불가한 물의 변성은 오늘날 예술가들의 유목적 삶에 대한 적확한 비유이자, 세계가 껴안고 있는 일상의 불안성과 불균질에 대한 포괄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안온한 삶을 뒤흔드는 격랑과 파고에 대한 불안과 공포, 존재의 안정과 삶의 안녕에 대한 수평적 희구는 각각의 개인이 처한 높낮이에서 작업의 방향을 낳고, 전시로써 순환하며, 전시 바깥의 삶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얻는다.
한국인 큐레이터 최희승과 헤이그의 예술 이니셔티브인 빌리타운이 함께 성사시킨 이번 전시 The Sea What We Want to See는 여러 가지 조건과 기획적 층위 속에서 실체화되었다. 각각의 도시에서 두 주최가 서로를 비추는 길잡이가 되어 서로의 예술을 탐사하고, 전시의 맥락을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암중모색 가운데 교류 전시의 가능성을 공식화시킨 것은 ‘기후위기’ 나 ‘물부족’과 같은 환경적 의제 혹은 식민역사나 오늘날의 경제사회적 쟁점도 얼마간은 있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러나, 전시의 실재를 들여다보면 그보다는 훨씬 복합적인 삶의 풍경을 통과 중인 개인의 경험과 통찰이 불투명한 방식으로 발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과 독일, 네덜란드 내 다른 도시에서 제작된 작업이 다양한 경로를 거쳐 헤이그에 소환되었고, 저마다의 형식과 재료로써 매개된 세 작가의 서사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고요히 흐르고 있다.
따라서, 관람객들이 만일 공간 안에서 작품 주변을 흘러 다니는 보이지 않는 부력과 척력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전시가 보여주고자 했던 역설적인 물의 힘, 즉 전복적인 희망의 물줄기를 공감하기 쉽지 않을 일이다. 여러 도시를 오가며 작업의 활로를 모색해 나가는 세 명의 여성작가- 노혜리, 윤지영, 이은새가 그려낸 작업의 활로가 상호 교차하고 한 곳으로 수렴되기보다는 무심하게 흩어진 채로 개별적 의미와 서사를 발산하는 구도로써 다가오기 때문이다. 가령, Flowing Down 연작을 비롯한 여섯 점의 신작으로 구성된 이은새의 회화 작업은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의 내부를 캔버스 바깥으로 끌어내어 수직, 수평으로 이루어진 공간의 안온함을 일시에 전복시킨다. 맹렬한 화염과 암흑 속에서 일상의 폭력과 괴물성의 이면을 회화로써 다루어왔던 이은새 작업의 전면에 스며든 물기는 해소될 수 없는 멜랑콜리아의 또 다른 질감이자 화면의 서늘함으로 드러난다. 이방인이 겪는 심리적 표류와 반복되는 침잠, 급작스러운 들뜸이 공간 속에서 작업이 산개하는 높낮이와 면적과 같은 다양한 위상으로써 독해되는 지점은 자못 흥미롭다. 서로 엉겨있는 인물과 착종되어 있는 신체의 부분들은 고립되어 보이고, 사물은 멍들어 있고, 일상의 풍경은 역류한다. 그러나 이은새의 작업이 절대적 어두움 속으로 침잠되지 않는 까닭은 그만의 상상력과 반전의 틈을 열어내는 다층적인 세계관과 삶의 역동을 수긍하고자 하는 회복성 때문일지 모른다.
공간 전반에 걸쳐 분포된 이은새의 작업 사이로 노혜리와 윤지영의 작업이 걸려있는 구도와 각도는 이 전시의 매우 이색적이고도 압축적인 구도이다. 일견 평온해 보이는 전시의 정경은 작업의 시간에 봉인된 ‘소리 없는 외침’을 고요하게 밀어내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 선명하게 떠밀려온 공포와 불안의 물결을 들려준다. 노혜리가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되살려낸 카약은 가느다란 나무 재료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것이다. 그의 작업 속에서 이민과 이주, 가족의 구성과 해체, 죽음과 애도의 문제는 물과 돌, 가루와 같은 기초적인 재료로써 조작되고, 은유되며, 운동성을 갖는다. 공학적인 의태나 장식성을 배제한, 소박하기 짝이 없는 배의 형상을 조금씩 다듬어나가며, 이국의 도시로 옮겨와 과거의 시간을 전시하는 일련의 수고로움은 지나간 시간과 존재의 부재를 추념하는 조각가다운 의례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에게 ‘카탈리나’ 바다는 고인이 된 아버지와 배를 타며 겪었던 위험천만했던 순간이 결정화된 고유명사이자, 때마다 흔들리며 재조정되는 삶의 관계항을 포괄하는 보통명사이기도 할 것이다.
그에 비해 윤지영의 작업 <한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내 내장을 꺼내 그물로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There was a time when, not knowing how to live, I took out my entrails to make a net)은 훨씬 낭창낭창하게 공간을 가로지르며 강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제목에서 명시한 바 대로, 마치 ‘내장’ 줄기처럼 보이는 실리콘과 천 조형물을 그물로 엮어 만든 해먹 형상으로 제작되었다. 자신의 장기로 짠 해먹에 눕는다는 자학적인 동시에 자위적 상상 속에 통증과 이완의 감각이 저릿하게 실려있다. 예기치 못한 상황적 맥락과 신체의 실존적 감각을 투영해 볼 수 있는 조각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온 윤지영에게 ‘그물’은 현재 자신이 처한 작가적 삶의 일면을 함께 직조할 수 있는 매개적 형식으로 보인다. 그것은 또한 물속의 것들을 건져 올리는 갈퀴이자, 무엇이든 실어 나를 수 있는 원시적 탈것이자, 비바람을 피해 잠시 몸을 뉘일 수 있는 최소한의 건축적 틀이기도 하다. 벽면 구석에 부착된 신체 형상의 작은 봉헌물은 작가가 바라는 치유와 구원의 상징물로, 비체에 가까운 현대미술의 형식과 종교적 문법의 형식이 공존함으로써 만들어내는 역설적 희망과 치유를 생각하게 하다.
세 작가의 작업이 갖는 상이한 원전과 서사술, 매체의 차이를 읽어나가며 존재가 스미고 흐르는 ‘하이드로’(hydro)한 방식에 집중하게 된다. 각각의 작업이 표명하는 바를 지나 합류하게 되는 공동의 심상 속에서 물이 있던 곳과 부재하는 자리가 나란히 포개진다. 매 순간 흔들리고, 분산되며, 금세 말라버리고, 별악간 불어나는 물의 불온한 특성은 오늘날의 세계가 대면하고 있는 물질적 과도함과 정서적 공백을 닮아 있다. 이러한 심상적 상상을 통해 각각의 작업이 ‘물’에 대한 시각적 인상이나 명징한 에피소드를 외연으로 끌어내지 않고서도 하나의 응집력 있는 전시로써 작동하지 않았을까 한다. 오직 세 작가의 세계로써 원하는 바를 충분히 대리할 수 있는 전시였을까 하는 작은 아쉬움이 남지만, 전시의 줄기는 언제나 이전과 다음을 잇는 매개적 사건임을 상기하며, 작품의 일생이 새로운 곳을 향해 흘러가기를 바랄 뿐이다.
헤이그에서의 전시는 막을 내렸고, 대양을 건너 다시 서울이다. 울퉁불퉁한 사건이 폭풍우처럼 이곳의 시간을 맹렬하게 휩쓸어 가고 있다. 빌리타운에서의 전시를 회상하며, 바슐라르의 물에 관한 글을 찾아본다. “휴식 속에서 참으로 온화한 물은, 마침내 파문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물의 신경이 바야흐로 활동하는 것이다. 그때 폭풍몰이꾼은 막대기를 물 밑바닥의 모래에까지 집어넣어, 샘물을 내장에 이르기까지 마구 채찍질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원소가 분노하여 그 분노는 우주적인 것이 된다. 폭풍은 울부짖고, 벼락은 폭발하고, 싸락눈은 타닥타닥 튀고, 물은 대지를 침수시킨다.”1 수평면에 반전된 이은새의 그림과 노혜리의 울부짖는 보트와 윤지영의 채찍질하는 내장 침대. 그때 그곳에서, 그들의 바다에게 내게 보였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때 들어왔던 것은 존재의 나약함이었고, 지금 다시 보니 삶의 강인함이다.
물에도 신경이 있다면, 물보라처럼 피어오르는 맑고 신선한 연못의 신경과 도저하고 흐르는 대양의 신경을, 이 세계에서 생생하게 마주하고 싶다.
1 가스통 바슐라르, 이가림 옮김, 『물과 꿈』, 문예출판사, 1980, p.257-258
* 전시 및 작품 이미지 보기
https://artviewer.org/the-sea-we-want-to-see-part-2-at-billytown-the-ha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