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그림자 물 볕 달 내음
밀어도 지지 않고, 쓸어도 차오른다
Shadow under the mountain, Light upon the water, Scent from the Moon
and it won’t fade, still rises
‘길이 길이 번영하다’는 뜻은 영등포의 지명 속 ‘永登(영등)’이 지닌 일반적인 풀이이자 바람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행정구역명인 ‘영등포구’를 다시 띄어 써보면, ‘영등’과 ‘포구’의 결합으로도 읽힌다. 한때 이곳이 수많은 인력과 물자를 실어 나르던 포구였다는 사실, 그리고 지역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영등제가 열렸다는 풍문은 지금의 지명 속에 희미한 흔적처럼 남아 있다.
영등포를 들여다보는 일은 곧 한 도시가 스스로를 갱신하고 소진해온 방식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부터 영등포는 한강 수운의 거점이자 교통의 요충지였고, 일제강점기에는 대규모 공장지대가 조성되면서 서울 서남권 산업화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해방 이후에도 제조업, 금융, 상업 기능이 집중된 거대 타운으로서의 위상을 이어왔다. 확실히, 도시의 수축과 확장을 반복해온 이 지역의 역사는 그 자체로 대단히 농밀한 특수사를 지닌다. 그러나 이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와 공동체가 공유해온, 서로 닮은 발전과 쇠퇴의 순환적 패턴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시 문명사에서 ‘번영’이라는 개념이 지닌 취약함은, ‘쇠퇴’라는 말에 내포된 회복 가능성과 맞물리며 비슷한 무게를 이룬다.
도시가 성장해 온 역사는 불안정한 리듬의 연속이다. 도시의 불규칙한 리듬을 마주하는 순간, 예술과 기술이 개입하는 방식 역시 다시 질문될 수밖에 없다. 올해로 세 번째 해에 접어드는 영등포문화재단의 예술기술도시 사업을 준비하면서, 도시와 예술, 기술이라는 세 가지 축이 그려내는 불균등한 거리와 속도, 면적에 대해 종종 생각하게 된다. 세 요소들 간의 이격과 지체 현상은 덜컹거리는 리듬을 만들어낸다. 국가 발전 논리가 주도하는 대도시는 가속도를 내어 몸체를 부풀린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도 저만치 앞서가는 듯한 착시를 준다. 그러나 삶은 때로 후퇴하고, 기술은 멈칫거리며, 예술이 배제된 공백의 순간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곤 한다.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그렇듯, 도시를 이루는 무수한 인자들은 불안정한 싱코페이션과 잦은 불협화음 속에서 끊임없이 엇박을 내고, 결국 ‘조성 붕괴’의 순간을 반복해 나갈 뿐이다.
만개한 봄과 함께 시작된 예술기술도시 사업 과정은 퍽 순조로웠다 기억된다. 기술과 예술의 ‘융복합’을 내세운 일련의 사업들이 남긴 기시감과 피로감을 돌아보며, 기술의 발전 그 자체보다 기술이 매개하는 창작의 가능성과 지역적 사유의 확장을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에 집중하고자 했다. 재단 측과의 논의와 숙고 끝에, 올해 공모 사업은 지역의 서사를 중심에 두는 작가적 실천과 급변하는 기술문화에 대한 시대적 통찰을 주요 지향점으로 삼게 되었다. 주제에 부합하는 작품(만)을 선별하는 방식에 머물기보다, 작업을 구현해 나갈 창작자들의 관점과 실행력에 이 사업의 명운을 걸어보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예술적 연구와 제안들, 창작과 제작, 그리고 공동의 전시로 이어질 긴 호흡을 준비하는 동안 내내 설렜고, 종종 긴장하기도 했다.
올해 전시에 앞서 영등포문화재단이 수행해온 다양한 학술·전시 사업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동안 축적된 내용적 유산과 관계 자원을 다시 확인한 일은 흥미로운 출발점이었다. 지역 연구와 기술 기반 작업, 나아가 예술교육을 매개로 한 여러 활동들을 전시 지형 속에 다시 수용함으로써, 전시의 지리학을 한층 두텁게 겹쳐놓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시처럼, 음악처럼’이라는 주제 공모를 통해 협업 아티스트를 초대하고, 함께 모인 이들의 작업 경로를 점검해 나가는 과정이 올해 사업의 내부 트랙이었다면, 그 바깥에서는 지역 서사와 기술문화에 대한 미적 탐구를 예시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는 작업을 리서치하여, 전시에 함께 할 이들을 모색하는 또 하나의 트랙이 가동되었다.
동료들과 함께한 워크숍과 강연, 작업 발표와 피어 리뷰 등 격주로 이어진 일련의 프로그램이 마무리될 즈음, 전시의 심상과 방향은 자연스럽게 가시화되었다. 공모 절차를 거쳤지만, 주제가 작업을 이끄는 연역의 방식이 아니라 작업들 간의 관계적 연결 속에서 향방이 드러나는 귀납적 방향이었다. 전시의 표제 《산 그림자 물 볕 달 내음》 역시 참여 작가들이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오늘날의 도시를 탐색하고 반추하는 과정에서 건져 올린 심상들의 집합에서 비롯되었다. 작업에서 포착된 개념과 물질의 목록에는 첨단과는 거리가 먼, 원시적이거나 투박한 이미지들이 스며 있었다. 흥미롭게도, 작가들의 작업에서 길어 올린 단어들은 오늘의 기술문화가 품는 내면적 균열을 다른 방식으로 비추어낸다. 지극히 일상적이며 얼핏 순차적으로 보이는 이 단어들은 서로 자리를 바꾸며 ‘산 볕’, ‘물 그림자’, ‘산 내음’, ‘달 그림자’ 등으로 변주되고, 그 과정에서 다채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최신 기술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단어들이 반(反)도시적 이미지를 환기한다는 사실은 어딘가 역설적이다.
작가들이 응시하는 대상은 절멸한 것들의 흔적이거나, 거대한 무엇에 가려져 은폐된 것들, 혹은 주변부로 밀려난 것들이다. 장소 만들기와 장소성의 상실, 기술 노동과 반기술적 신체, 성차와 계급의 분할, 소비문화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직접적 용어 대신, 산·물·달은 오늘날 도시의 시간과 공간을 구성하는 것들을 곧장 지시하기보다 멀고 먼 우회로를 통해 발화되는 표현형이자 최후의 메타포가 된다. 그러나 이 표상들이 단순히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된 자연이나 상실된 인간성을 향한 연민만을 투영하는 것은 아니다.
야트막한 산등성이 하나 없는 서울의 평지, 영등포에 드리운 도시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삶의 요동이 사라진 강변의 안온함을 의심하며,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시시한 분투를 저 먼 행성과 연결 지으며 근격으로 당겨오는 일은 어떤 이에게는 실증적인 기술문화적 쟁점이자, 입증된 현상과 해석에 대한 예술적 반론을 준비하는 오래된 습관과도 같은 일이다. 결국 특정한 지역을 응시하는 일은 그 너머의 세계를 비추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기술이 작동하는 장소 역시 산과 물 사이에 걸쳐진 도시이자 비(非)도시, 때로는 반(反)도시의 영토라는 점에서, 영등포라고 하는 특정한 지역을 향한 관심은 결국 그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를 향한 공평한 시선을 전제한다. 따라서 시간과 장소의 경계에서 번성하고 쇠락하는 기술과 노동의 이야기는 특정 지역의 초상을 넘어, 지역을 초월한 보편의 서사로 확장된다.
전시의 부제, ‘밀어도 지지 않고, 쓸어도 차오른다’는 문장은 현실에 대항하는 결기어린 외침이나 미래를 향한 선언만은 아니다. 이는 우리가 목격하고 실험하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해온 과정의 기록이자,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상에 대한 보고형 문장이다. 도시 문명, 과학기술, 인간과 자연이 형성하는 다차원 방정식은 때론 파괴적 충돌과 위협으로 다가오지만, 동시에 각자의 자리를 팽팽하게 유지하며 존재의 좌표를 맞바꾼다해도 일말의 공존가능한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원거리의 대양과 메말라버린 도심의 포구, 가청 범위를 벗어난 달의 포효와 영등포 골목을 가르는 쨍쨍거리는 절곡음, 낮은 산 하나 없는 마을의 철근 콘크리트 산새 - 이러한 상상들은 도시의 광대한 시간성과 인간 존재의 하찮음 사이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한편, 우리 중 누군가는 복잡한 세속의 이야기를 날카로운 시어로 압축하고, 몇 마디의 단순한 리프(leaf)로도 긴 광시곡의 구조를 지어올린다. 그 ‘누군가’의 몫을 자처하는 이들이 바로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일 것이다. 이들의 행위는 광폭한 사유와 천진한 실행을 담보한다. 그러나 질문은 쉽게 해갈되지 않는다. 그림이 시처럼 세상을 서술하고, 시가 음악처럼 삶의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일이 정말 가능하다면, 예술이 기술을 의태하고 기술이 예술을 모방·학습하는 오늘의 현실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 흐름 속에서, 예술과 기술이 서로를 어떻게 비추고 흡수하는지에 대한 오래된 물음이 다시 떠오른다. 예술과 기술이 본래 하나였다고 말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서로 다른 방향으로 총력전을 펼쳐온 그 ‘격차’를 기어이 좁히고자 하는 욕망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올해의 예술기술도시 프로젝트는 지역의 역사와 삶을 주춧돌 삼아 출발하며, 전시에 앞선 시점에서 제안의 결구를 이미 밝힌 바 있다. 기술의 원리를 ‘시처럼’ 독해하고, 기술이 매개하는 삶의 풍경을 ‘음악처럼’ 펼쳐나갈 또 다른 제안들을 기다리겠다는 야심 어린 문장은 하나의 그물코가 되어, 다양한 작가들과 함께 마디마디를 엮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첫 제안의 고갱이들을 모아 돌덩이처럼 굴리는 사이, 무더운 계절이 한바탕 지나가 버렸다.
불가근불가원의 태도로 세계를 관찰해온 이들의 시점은 어느 순간 일인칭으로 옮겨가고, 때로는 전지적 시점에서 수집된 정보들을 해체하며 진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각자의 시점을 넓히고 좁히기를 반복하면서 세계의 복잡성을 꿰뚫어보려는 시도가 결코 만만치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최선의 차선을 좇는 과정의 한 허리춤에서 전시는 기어이 열리지만, 그렇다고 전시가 작업의 전부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보여주고자 했던 것의 일부를 포기하고, 꼭 이루려던 지점을 허물어뜨리는 과정 속에서야 비로소 작업도, 전시도 가능했을 것 같다. 전시기획 역시 한 개인의 결핍과 실패를 내장한 사유의 과정이며, 여러 제약점에 대응하고 조율하는 매개 노동이라는 점에서 그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어림 짐작해본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한강의 윤슬과 아름답게 솟아오른 여의도의 빌딩숲을 뒤로하며, 도시의 비정과 인간사의 고독을 그려낸 김승옥의 소설 『도시의 달빛 0장』(1977)을 떠올린 적이 있다. 차디찬 겨울밤, 일시에 모였다 흩어진 사람들의 숨결, 말해지지 않은 표정들, 이해할 수 없는 떨림과 흥분이 충돌하고 흩어지는 장소가 오늘의 도시다. 0장이라는 그 말 속에는 인간의 서사가 담기기 이전의 일렁임과 공허가 스며 있다. 오래전 저자가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 도시의 성장과 삶의 퇴락이 교차하는 그 미세한 틈에서 인간이 감당해야 했던 흔들림은 아니었을까. 전시를 통해 갖가지 신기술에 기대어 작가들이 포착하고자 했던 것 또한 흔들리는 존재와 시간, 장소의 양태였을 것이다. 하여, 열닷새간의 짧은 전시가 화려한 기술의 성전으로 박제되거나 예술이라는 이름의 신기루로 흩어지는 대신, 요동 속에서도 존재의 생존 신호와 잔존 방식을 탐색하려 했던 시간으로 어딘가에 남아주었으면 한다. 예술이 기술처럼, 기술이 예술처럼 서로의 방식을 비추며, 도시의 윤곽 속에 숨어 있는 삶의 비기를 조용히 드러내주었으면 한다.
영등제의 영험함도, 옛 포구의 정취도 사라진 채, 도시의 안면은 쉼 없이 새 얼굴을 드러낸다. 번쩍이는 광원과 해독 불가능한 시그널로 가득 찬 이 도시에서, 한낮의 태양도 깊은 밤의 달도 효용을 잃어버린 듯 보이지만, 불멸하듯 존재하는 것들이 반갑고도 그립다. “밀어내도 지지 않는다”는 미련하고도 묘연한 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쉽게 지치지 않고 어둠에 잠기지 않는 것들을 하나씩 호명해 보고, 쓸어도 차오르는 것들의 자리를 응시해 본다. 달내음은 무미하고, 물볕은 컴컴하고, 산그림자는 애초에 드리운 적도 없지만, 손닿지 않는 것들까지도 세계의 한 자락으로 끌어안는다.
글 조주리(2025 예술기술도시 총괄기획)
전시개요
주최 및 주관: 영등포구, 영등포문화재단
사업명: 2025 예술기술도시
전시명: 산 그림자 물 볕 달 내음
일시: 2025.10.17- 11. 02. (월 휴관) 11am - 7pm
장소: 영등포구 내 하나로 마트 (서울시 영등포구 경인로 719)
무료관람
*작가: 김태희&김수빈, 김현석, NULL(남민오, 김윤하, 김혜원), 박심정훈, 박은영, 배진선, 백종관 , 손수민, 우주여행자 언해피, 이해련 , 임승균 , 전보경, 정아람, 조말, 차지량, 홍범, 최찬숙, 추미림, 신미정, 참새
*주요매체: 기술기반의 복합 미디어, 영상, 사운드, 라이트, 향, 퍼포먼스, 조각, 드로잉, 아카이브 설치 등
*전시구성
프로젝트의 창,제작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리서치 아카이브와 신작 프로덕션, 초청작가 섹션 구성, 아모레퍼시픽재단 협력작업, 종근당 고촌재단 청소년 교육 프로젝트 쇼케이스 (바이오 오딧세이)
*프로젝트 배경 및 목표
2025년 봄부터 가을까지, 총 6개월 동안 영등포문화재단 주도로 주제 공모와 작품 선발, 워크숍 시리즈, 그리고 기획 전시로 이어지는 ‘예술기술도시’의 여정을 이어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참여작가들과 함께 영등포의 사회문화적 서사와 지역적 특수성을 탐구하고, 동시대 기술 발전의 쟁점을 교차시키는 ‘도시 읽기/쓰기’를 촉발하고자 하였다.
본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관계 맺기’의 위상학은 예술과 기술의 매개를 넘어서는 것이다. 지역과 기관, 지역과 작가, 기관과 작가, 나아가 작가 간의 연결까지 포괄하며, 오늘날 ‘지역’이 직면한 현실을 보편적 역사 속에서 바라보는 동시에, 고유한 맥락 속에서 성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산 그림자 물 볕 달 내음》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이는 기획 전시는 작가들 간의 교류 속에서 이루어진 상호 배움과 탈학습의 단편들을 담아낸 결과물이다. 전시가 단순한 작품의 집합을 넘어, 지역과 삶, 나와 타인,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관계와 경계를 사유하는 중계의 장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한다. 서로의 작업 속에 생각을 투영하고 교차시키는 과정을 거쳐, 다양한 만남과 집단적 형성 속에서 발생하는 사유의 변화·확장·충돌을 드러내고자 한다. 아울러 이번 전시는 영등포문화재단이 다년간 축적해 온 지역 연구와 기술 기반 작업, 더 나아가 예술교육을 매개로 한 활동을 전시 지형 속에 재수용함으로써, 전시의 지리학을 더욱 두텁게 겹쳐 놓는다. 궁극적으로 본 전시는 ‘관계적 지역학’의 가능성과 ‘기술의 생동성’을 실험하는 작가들의 사유 과정을 따라간다. 관람자의 시선과 판단이 개입되어 평평하게 그려진 기술 기반 세계 지도 위에는 다시금 울퉁불퉁한 지역의 초상이 새겨지고그 위에 각자의 삶의 좌표가 놓이기를 제안한다.
(그래픽 디자인: 와이 팩토리얼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