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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우:광대한 습작법

샛바람에 실려가기, 잔물결에 젖어들기, 바윗돌에 부서지기

by jr united

유상우, 광대한 습작법


샛바람에 실려가기, 잔물결에 젖어들기, 바윗돌에 부서지기


인공적인 것들로 가득 찬 도시지만, 어느 틈에 순하고 여린 녹색 잎들이 지천인 계절이다. 흐드러진 녹음 속에서도 지나간 계절의 서늘함을 떠올린다. 전염병의 기세와 그 보다 질긴 인간의 회복력이 갈마들던 시간이 종료되었지만, 반들거리는 것 앞에서 시들어가는 것을 짝지어 보던 습관은 남아있다. 한편으론 서걱서걱한 시간을 지나는 동안 겉으론 움츠러드는 듯 보이지만 내면에 물기 어린 생각의 살결이 돋아나기도 하니, 작업의 씨앗이 샛바람이 매섭던 그때 절기에 실려와 여기까지 흘러왔나 싶다. 유상우의 작업을 서울에서 만날 채비를 하며 든 생각이다.


서울과 시카고. 혹은 시카고로부터 서울까지. 원거리로의 이동이 일상인 시대지만, 두 좌표 사이에 돋아난 산과 들, 물, 식생의 격차가 몰고 온 바는 예상치를 멀리 선회한다. 미국으로의 이주와 한시적 정주는 작가의 세계를 부풀리는 확장의 모멘텀을 제공했지만, 이방인으로서 맞이한 일상을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것들을 잘게 다지듯 감각하고, 평범한 풍경의 이면을 이리저리 들춰봐야 하는 수축의 시선 또한 요하게 된 듯싶다. 어수선하던 단상들이 치밀한 작업 계획으로 옮겨온 순간은 언제였을까. 이 세상에 자명하게 바라봐야 할 것도, 자연스럽다 여겨야 할 것도 없음에 공명한 때였으리라.


2023년과 24년, 두 해 동안 전개된 유상우의 작업방식은 시각성으로 흡수되는 풍경의 총체를 물질의 단위로 미분하고, 감각의 차원으로 용해시켜 나가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환 경조각과 장소특정적 설치방식에 지향을 둔 작가의 실천으로부터 개념미술과 퍼포먼스를 우회하는 대지미술의 유산을 읽어낼 수 있다. 창작 과정에서 생성된 물질의 파편을 쌓고, 옮기고, 폐기하고, 되살리는 일련의 순환성은 작업실과 화이트큐브, 도시공간, 자연환경으로 이어지는 궤적 위에서 구현된다. 공공미술이라는 틀에서 바라본다면, 공공성을 내장한 가치 지향과 작업의 미적 특질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련함이 돋보인다.


작업이 지닌 물리적 섬세함과 과정의 올바름은 작업의 중요한 일면이다. 그러나 결국 관람객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고, 최후에 침잠하는 것은 바닥에 내려앉은 한 줌 먼지의 무게, 바람결에 흩어지는 향기의 농도, 수면 위에 내려앉았다 녹아버리는 종이 한 장의 감촉에 묻어난 ‘사소한 광대함’이다. 연약한 감각은 상실의 지향을 굳건하게 만든다. 여러 형태와 방식으로 변주를 거듭하고 있는 작업 ‘상실의 풍경(Portrait of Loss)’에는 이러한 감각이 집약되어 있다. 전시가 표명하는 메시지가 생태의 순환과 물질의 해방이라면, 물질의 생산과 이동에 간여하는 ‘전시’라는 제도가 갖는 당착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작가는 충분한 숙고를 통해 문제를 돌파해 나간다.


즉, 스펙터클이 가리고 있는 물질의 이동과 재건가능성을 의욕적으로 보여주는 작가의 행위는 독특한 역설을 낳는다. 존재의 상실과 물질의 파괴는 누군가의 필연적 재건으로 인해 실체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상우는 상실의 파편들을 끌어 모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상 사물과 원재료에서 추출한 것들을 섞고, 새로운 상태로 변화시킨다. 작가는 이를 ’ 재연결’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온전히 수긍하자면 본래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 끊어진 상태를 포착하여, 이를 다시 재생하고자 하는 작업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보이지 않는 미생물 단위로부터 도시의 정경을 이루는 메가 빌딩 숲, 이웃 도시의 숲과 원거리의 강과 바다까지, 서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없다. 고대의 잠언도, 중세의 신비주의도 아닌 오늘날 가장 고도화된 과학 지식이 입증하는 바다. 작가의 통찰에 따르자면, 총체적 사고를 가로막는 것은 정신성의 고갈이 부추긴 물질과 자본에 대한 갈증, 그리고 그로 인한 시각성과 인공물의 과잉이다. 시각적인 덩어리를 잘게 분쇄하여 여러 차원의 감각으로 분산하고, 대상의 소멸에 수렴하는 효과는 물질을 배격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보다는 가시화되지 않는 여분의 감각에 대한 집중을 높이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멸하는 것들을 진중하게 드러내는 행위에 가깝다.


크고 단단하고 질긴 것들, 특히 공공 조형에 대한 염증 섞인 의문이 마음 한켠을 점령한 이에게 가능한 조각적 안티 테제는 여럿일 수 있다. 그중 작가의 해법이 꼭 ‘만들지 않기’ 라거나 ‘작게 만들기’에 치우치지 않음에 우선 안도한다. 작업의 실천 안에는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유기물을 빻고, 말리고, 굳히고, 녹이고, 흘려보내는 것과 같은 우아한 공정이 포함된다. 작업실의 연금술을 통해 목표한 바가 사금파리 조각을 모아 반짝이는 보석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반짝이는 고체덩이가 가루가 되고, 가루는 물과 화합하여 종이가 되고, 얄따란 것은 다시 입체물이 되는 물질의 자연스러운 순환론이자 인간이 개입하는 역공학적 접근이다.


대단해 보이는 것들을 시시한 것으로, 시시한 것들을 또 다른 시시함으로 상태 변경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과 또 다른 물질 사이에 어떤 결정적 위계가 있지 않음을, 존재 간의 마법적 환원이 불가능함을 입증하는 중 일 거라 짐작한다. 작업이 드리워낸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은 남루한 현실을 갈아 신기루 같은 형상을 빚어내는 오늘날의 혼란한 물질계와 퍽 닮아 있다. 땅 속의 둔탁한 금강석과 쇼윈도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 링의 차이를 이해 못 할 사람은 없겠지만, 두 물질의 동일성과 연결관계를 이해하는 자만이 이 세계의 또 다른 서사를 펼쳐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하여, 신기루를 곱게 빻아 대지와 대양으로 흘려보내는 작가의 손길에서 솔방울 같은 희망을 기어이 발견한다. 샛바람에 실려가고, 잔물결에 젖어들고, 바윗돌에 부서지며 여기저기 묻혀온 것들을 기록하고 의심하며 해체하는 습관 같은 나날이 한동안 이어졌으면 좋겠다. 전시에 딸려온 온갖 사소함이 너무 웅숭깊어지기 전 재빨리 광대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다.



글 조주리



*2025년 금호미술관 영 아티스트 전 작가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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