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밖의 풍경 - 파동을 치대는 ( ) 들
글 조주리
작가 김용원은 지난 10 여 년 간 붓과 먹, 종이로 이루어진 전통 산수의 세계로부터 멀어졌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작업의 쟁점과 표현 양식을 넓혀왔다. 물질성의 과잉과 정신문화의 쇠퇴, 그리고 그 사이에서 변모해온 자연의 초상과 인간 삶의 위기를 좇아온 그의 시선과 유목적 삶의 방식은 여러 매체를 횡단하며 중층적인 작업을 추동해 온 동인이라 할 수 있다.
회화적 양식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에서 김용원은 자신만의 구도 설정과 채색 실험을 통해 꽤 다양한 것들을 접합하고 중첩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가령, 물감으로 침윤된 화면의 물성과 오려 붙인 것들의 병치, 재현된 자연의 빛과 전기적 광원의 교차, 사생을 통해 마주한 자연에 대한 인상과 재구성된 풍경의 왕복 같은 것이다. 실재와 관념이 교차하는 영역은 때로 평면 회화로부터 출발하여 점차 삼차원의 공간 속에서 빛과 영상을 포함한 매체를 혼합하는 조각과 설치로 확장되어 왔다. 지속적인 양식적 변주와 실험, 매체의 혼합과 확장을 일궈온 작업의 기저에 오늘날 시각 문화의 일부로서 소비되고, 제도적으로 소비되는 전통 회화의 현대적 계승과 모색에 대한 자기 분투가 있다.
평면 작업으로부터 입체물의 제작자이자 공간을 다루는 설치 작가로 운신을 넓히고,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외형을 넓혀오는 동안 작가의 인식은 실재하는 ‘풍경’을 ‘재현’하는 작가의 숙명이 실은 대상을 그대로 화면에 퍼담아 올리는 기예이기 보다, 무엇을 풍경으로 규정하느냐의 문제와 시각적으로 관찰한 것 너머의/이후의 것을 어떻게 편집하고 직조하느냐의 동시대적 서사술에 있다는 깨달음의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고도화된 예술 노동에 기반한 김용원의 작업이 전시의 맥락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꽤나 진지한 동행임에 틀림없다.
전시 ≪시간 밖의 풍경 - 파동을 치대는 ( ) 들 ≫(2024. 10.4 - 10.27, 여수: 예울마루미술관) 은 올 한 해 동안 여수 장도에서 김용원이 바라보고, 귀기울이고, 몸으로 대면해온 시간의 굴곡을 그의 작업으로 기록하고, 증언하며, 또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사유하기를 제안한다. 작업과 전시를 매개삼아 김용원이 재편한 시공간의 서사는 작은 음각 드로잉에서부터 대규모 회화-설치, 다큐 영상과 프로젝션 매핑의 형태로 나뉘어 발산되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일부를 연결하고 비추는 다겹의 구조를 지향한다. 이번 전시는 풍경을 주요한 심상으로 다루면서도, 이전에 비해 훨씬 구체적 지역 서사와 삶의 맥락을 작업에 개입시킴으로써 서사적 요소에 풍부함을 불어 넣는다.
그런 점에서, 올 한 해 여수에서 보낸 시간은 그간의 작업을 통해 지속해왔던 주제 의식과 양식적 특질을 잔존시켜면서도 보다 적극적인 견지에서의 지역 탐구와 작가 연구가 어떻게 확장되고, 작업으로 가시화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경우 ‘아티스트 레지던스'가 함의하는 바가 낯선 지역에서의 일시적 정주와 그 부산물로서 쌓인 것들에 대한 후일담이지만, 이곳 장도에서의 독특한 삶의 풍광과 낯선 조건들이 필시 작가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방인에서 경계인으로, 다시 내부인으로 파고 들어가고자 하는 동력을 제공하고 작업적인 변화를 견인했음에 분명해 보인다.
작가의 지속적 관심사는 자연과 풍경과 같은 가장 근원적인 것들로 압축되고 반복하여 회귀한다. 그 이면을 살펴보면 결국 그 속에서의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과 대립, 존재의 생멸에 깃든 복잡한 역동에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가령, 물질 문화의 번성에도 불구하고 결코 변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곤 하는 물과 바람의 원시적 힘, 해양과 땅의 견고한 뼈대와 살결이 있다. 김용원의 시선은 대체로 견고해 보이는 자연의 초상 속에서도 미세한 균열과 위기의 징조, 밀려나고 지워지는 삶의 망실점으로 향한다. 때로, 작가적 사유는 억겁의 시간과 문명 단위로부터 다시 몇 해, 몇 주, 그리고 인지 불가능한 어떤 불투명한 순간으로 미분화되며 급진적 상상에 기반한 통합을 이뤄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시간과 공간의 관계항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바닷물의 높이 차, 즉 ‘물때’를 매일 경험하는 일은 미시적 순간 안에서도 자연을 비롯한 전 존재를 요동치게 하는 어떤 ‘파동’을 감지하고, 아주 작은 파동이 몰고오는 또 다른 광대한 변화점을 주시하게 한다.
전시의 주요한 서사로써 작동하는 작업 <물때 기록 프로젝트>는 여수 안에서의 장도, 다시 작가 스튜디오로 이어지는 경계적 시공을 다룬 작업이다. 즉, 외부 세계와 절연된 시간을 강하게 의식하며 이를 일종의 작업의 공간적 조건으로 삼은 셈이다. ‘고립’속에서 발생하는 생산적 긴장감과 자유로움의 역설은 물에 갇힌 시공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파노라마 작업으로 가시화된다. 더불어, 장소 맥락을 강하게 반영하는 자연 속의 설치와 그에 대한 기록은 또 다른 전시 공간으로 옮겨 오면서, 장소에 대한 작가의 몰입 경험과 의미화의 과정을 다시금 또 다른 차원으로 이식해 온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오직 이곳에서만 한시적으로 가능한 일인데, 시공간적 조건이 작업을 지연시키는 방해요소가 아닌 긍정적 기회로써 모색되었다. 작업에 허락된 시간 동안 표면에 얇은 직물을 붙이고 이어나가고, 그 사이로 붓칠을 교차하여 너비와 깊이를 쌓아나가는 고유의 작업 방식이자, 이를 수행하는 작가의 퍼포먼스를 담아낸 아카이브 필름이기도 하다. 척력에 의해 높아졌다 낮아지는 물결에 투영된 것은 사회적 연결과 은둔 속에서 작동되는 작가 삶의 지형학이기도 한데, 이곳에서 경험한 일시적 고립과 그로 인한 발생한 생산적 긴장감이라는 역설을 드러낸다.
‘시간’과 ‘파동’은 이어질 ‘실향’의 해석과 함께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쇳말을 제공한다. 물때에 따라 고립되고 다시 연결되는 독특한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지역의 풍경과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역사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작가적 질문으로 나아간 것이다. 관조적 대상으로서 주지했던 물결의 흐름과 운동성에 대한 관심은 이내 물을 둘러싼 비가시적 주체들의 역사성, 역사화 되기 어려운 존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전시를 이루는 또 다른 축에 <실향풍경>이 있는데, 보다 구체적인 사건과 삶의 단편을 담고 있다. 즉, 물의 역동을 통해 시간과 공간과 존재의 축을 고민하는 작업이 일종의 관조적 시선과 미적 대응을 내포하고 있다면 후반부의 작업은 장도라는 조그만 터를 배경으로 끊임없이 소실되고 밀려나는 현실적 위상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섬에 있던 옛 돌이 외부적 힘에 의해 버려지고, 이주하게 되고, 외부에서 유입된 장식용 돌로 대체되는 과정은 지난 시간 지역 내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존재들의 이주와 실향에 관한 꽤나 직설적인 비유다. 물과 달라서 돌, 암석 등은 움직임과 소실의 빈자리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자연적으로 유실되거나 강제로 이주당한 돌에 대한 관심은 곧 시정의 정책에 의해 말끔한 투어 스팟으로 변모한 장도의 모습과 한때 이곳을 터전으로 삼았던 선주민과 이미 다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원래’의 것들에 대한 작가의 애착에서 비롯된다.
한편, 장도 주변에서 발견한 재료들을 그러모아 연출한 설치 작업 <파편의 연대기>는 진중한 기록이기 보다는 혼성의 풍경이자, 가상의 자연에 가깝다. 영상과 사운드를 투영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풍경은 시간 속에서 패이고 쓸려나간 자리를 애써 메꾸고 신비롭게 치장한 것이다. 도처에 가득한 세계의 파편을 줍고, 끊어진 이음매를 찾아 서로의 접면을 확인하고, 누락된 자리를 더듬으며, 기어이 무엇인가로 채워놓고자 하는 작가의 직능이 또 한 번 갱신되고, 강화되다. 사라져 가는 것을 붙들어 매고자 하는 선한 노력과 이미 소실된 것들을 가시적인 형태의 레플리카로 보존하고자 하는 작가적 상상력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밀려나고 지워지는 연약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과정 안에 끈질기게 기록하고, 3차원 상의 물질태로서 증언하고, 실향을 가속화하는 사회문화적 힘과 이를 둘러싼 여러 존재들이 발신하는 무수한 파동을 들여다 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마주했던 시간 속의 풍경을 모아 또 다른 차원에서 이를 되살리고, 삭제하고, 다시 구축하는 동안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찰나에 깃든 광대한 시간의 깊이를 기억하며, 끊임없이 부서지고 흩어지서도 우리 앞에 되돌아오는 미세한 물의 입자가 지닌 끈질긴 삶의 생동을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큰 움직임으로 다가오는 파도 대신 그 곁의 잔잔한 파동을 지켜보는 일, 무엇이 그 파동을 일으키는지 관찰해 보는 일, 수면 아래 깊은 곳에서 아주 천천히 멀어지는 돌의 일생을 상상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전시는 오늘 하루의 삶을 세차게 치대는 파동에 흔들리면서도, 어제와 내일의 시간을 끈질기게 이어 나가는 연약한 존재의 놀라운 강인함을 풍경으로, 풍경을 담은 화면으로, 화면을 담은 또 다른 풍경으로 되먹이고 드러낸다.
작가 홈페이지
https://www.yongwonkim.com
작가 인터뷰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3BoGwg8c5d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