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미술 6월호_ 교류- 없는 교류전, 연구- 없는 연구전을 지나오며
해방 이후 어느 때건 국가 간의 교류전시, 혹은 지리적 경계로 획정되는 블록형 국가전시들이 꾸준한 주기로 있어왔다. 꽤 긴 세월동안 효력을 발휘했던 문화 원조와 공보의 어휘들은 90년대를 기점으로 국제교류 프로그램이나 협력전시 등의 용어들로 전환되었고, 전시라는 외형적 아웃풋 외에도 큐레이토리얼 리서치나 레지던시를 기반으로 한 예술가 교류, 각국 플랫폼 간의 수평적 연대 등 다양한 층위로 계발, 이행되어 왔다. 미술제도의 분화와 새로운 공간들의 출현, 비엔날레의 확장세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큐레이터 집단의 성장 또한 지정학적 전시 생산과 교류형 플랫폼 사업에의 모멘텀이 이어져 온 한 축이 아닐까 싶다.
이런 속에서 특정 지역과 국가, 나아가 국가들의 연합체에 관한 전시를 기획하는 일은 기획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경계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전 방식의 교류전시사를 되돌아보면 내용적 성취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하나의 기관주도형 ‘장르’로 고착된 듯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그 틈바구니에서 의미있는 전시들이 조직된 사례도 얼마간은 있었을 테고, 결과적으로 미술을 통한 이해나 교류에 기여한 측면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정학적 구도를 전제로, 미술을 경유하여 표명하고자 하는 문화정치 논리가 기저에 깔린 기획전이란 결국 기관의 정책적 판단과 그 내외부에서 기용된 기획자들 개인의 제한된 지식지에 의해 구성되고, 그들이 지지하는 미술의 언어로써 대리-홍보되는 관제적 전시의 성격을 뛰어 넘기 쉽지 않다.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축적된 연구와 교류의 서사들, 거기에서 길어 올린 전시기획의 독창성, 전시라는 중간지대를 통과하면서 새롭게 발굴, 해석된 지식과 담론의 구성, 미술 창작을 통한 사회적 발언이 이루어졌던 전시는 과거에도 많지 않았다. 또한, 지금까지의 전시 만들기 관행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 도래할 전시의 풍경들로부터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기시감과 뻔함을 걷어내기란 요원해 보인다.
최근 십여년 간 아시아에 대해서 집중된 기관들과 기획자들의 열띤 관심 또한 앞서 서술했던 국제교류전에 대한 비평적 분석과 아시아 미술 혹은, 미술 속의 아시아를 둘러싼 국제 미술계의 복합적 동세 독에서 독해되고, 자각되어야 한다. 서구의 큐레이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모두 일정 부분 아시아를 대안적 플랫폼으로, 근현대 역사문제를 전시의 소재로, 나아가 아시아성 그 자체를 선취해야 할 미술담론으로 소비해 오지 않았던가. 우리 자신이 그 내부에 있으면서도 때때로 유체이탈 하듯 아시아를 대상으로 메타 큐레이팅 하려는 충동은 경계와 탈경계, 식민과 탈식민의 서사를 썼다 지우며 아시아성을 규명하거나 부정하는 분열적 양상으로 이어졌고, 한편으로 아시아 네크워크와 교류의 당위를 설파해온 중요한 동력이었다.
그 가운데, 아세안은 가장 최근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아시아 내 경제, 문화 공동체이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10개국으로 구성된 아세안은 아시아 내의 전략적 구성체이며, 우리에게는 중국에 버금가는 경제 교류지다. 이미 개인들의 국경 없는 여행과 이주, 국제 취업과 결혼 등 저마다의 이유로 아세안 내의 모빌리티는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그 속도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분명 우리의 문화적 인식과 예술적 교류이다. 준비되지 않은 우리 앞에 다가온 수많은 삶의 현안들은 오늘의 경제지표나 내일의 선린외교 성과와는 다른 결에서 진지하게 성찰해야 큰 화두다. 문화연구와 예술실천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대응해야 할 지점들이 있다면 바로 이 영역에서 일 것이다.
작년과 올해에 걸쳐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아세안문화원의 객원 큐레이터로서 문화연구와 전시기획에 참여하면서 반복해서 든 생각은 적어도 이 영역에서만큼은 아세안을 집단명사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10개국의 총합이 아세안도 아니며, 반대로 아세안이라는 틀이 어떠한 개별체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처럼 대체로 국가, 민족, 인종이 합일되지 않고 종교와 경제권, 국제 정세에 따라 복잡한 분포와 이산의 경향을 지닌 아세안 내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대한 섬세한 이해 없이는 아세안을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전근대적이라고도 여겨질 수 있는 왕정이나 그에 가까운 종교적 지배체제 등 많은 부분이 절대적 무지와 오해, 배격의 지대에 놓여있거나 또 다른 이국적 신화로서 신비화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니, 이제야 겨우 아세안과 이웃 국가들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전반에 대한 기초적인 수준의 지식과 최소한의 분별력을 생겼다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다. 전통에 대한 보편적 통찰과 개별적 특수성에의 이해 위에서 지금 우리 앞에 당도한 생경한 이미지와 오브제의 나열이 아닌, 그것들을 예술적 심상으로 번역하고 전시의 구조로 제유해내는 일. 전시 끝에 다다르게 될 희미한 목표점이다.
그러나, 당장은, 나 혼자는, 지금의 구조 속에서는 어려운 목표 설정이기도 하다.
특히 서양미술사 연구와 서구의 문화이론을 기반으로 성장한 미술기획자들이 갖는 관점의 제약과 세계관, 전시의 문법과 윤리에 대해서 스스로 경계할 점들이 적지 않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보면, 각 국가별로 전문적 지식과 연구역량을 갖춘 아세안 전문 학자들도 많고, 아시아를 주 무대로 활약하는 국제적 기획자들도 늘고, 가까이는 아시아의 지식 창고를 표방하는 광주의 아시아문화전당과 아세안의 삶과 문화를 소개하는 부산 아세안문화원이 개원하여 과거에 비해 연구와 기획 생태계가 두터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인적 자원과 기관의 성장이 곧바로 질 높은 프로그램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기획자 개인의 창조성이나 과잉 노력에 기댄 전시 생산은 어쩌면 요행일 것이고, 그런 요행이 반복되는 것은 불행일 수 있다. 누구에게나 기획생산의 기회가 주어져도 일정한 순도와 밀도를 갖춘 문화예술 프로그램 생산이 가능해지는 협력적 구조가 이상적일 것이다. 행정이 예술적인 수준으로 올라오고, 기획 또한 현실적 상황에 맞닿아 있다면, 반복되어 온 엇박자도 줄어들 것이다.
무엇보다 긴급한 페이스로 조직되는 전시를 되도록이면 미루고, 기초적인 지식교류와 생산의 구조를 고민해 볼 필요성이 대두된다. 일반적인 지역학, 민속학 기반의 학술 연구와 달리, 전시와 문화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연구 혹은 연구기반 큐레이팅이란 기획자와 작가들로부터 제안되는 예술적 연구이며, 당장의 효용가치보다는 느슨하게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모델이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아세안을 대상으로 한 연구의 당위성과 연구윤리부터 찬찬히 되짚어 보고, 전시를 중간-산물로 하여 견인되는 다양한 스케일의 중장기 연구와 출판, 학술 프로그램, 공동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해 보아야 함은 상식선의 문제이다. 또한 교점을 가진 기관끼리의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되묻게 된다. 학계와 미술계, 외교기관과 문화예술기관, 공공기관과 대안기관, 기관 큐레이터와 개인 연구자들의 연구 및 기획 자원이 자유롭게 순환했던 때가 있었던가 싶지만, 향후 분명히 필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전시기획자를 포함한 많은 문화생산자들 스스로가 아시아의 문제, 특정하자면 아세안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인식, 그나마 알고 있는 것들조차 부박한 편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자기 성찰은 이미 기저에서 공유되는 인식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별로 네트워킹할 만한 미술 공간에 대한 목록화가 전개되고, 해당 씬을 대표하는 이름있는 기획자 리스트가 파악되고, 국제 전시의 성격에 적합한 안정적 작가군에 대한 조사가 진행된다고 해도, 그것이 꼭 전시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희귀해 보이거나, 새로 획득한 정보에 득달같이 접속하여 무엇이든 자원으로 포획하고 콘텐츠로 연출하고자 하는 전시에의 충동을 자각할 때마다 스스로를 제어하게 된다. 야트막한 정보와 지식, 그리고 특정한 네트워크에 먼저 노출되어 있다고, 여행과 출장 몇 번 다녀왔다고 해당 지역이 전문가연 하며, 이름 옆에 슬며시 지역전문 기획자 크레딧을 덧댄 이들을 보면서 얼마나 볼썽 사나웠던가. 아시아로 구획 지을 수 있는 가상적이며 유동하는 지금의 판 위에서, 곳곳을 행선지로 한 연구공모와 트래블링 프로그램, 교류전시에 기금을 대는 문화정책과 현 미술제도의 종합적 포석 안에서,기획자들과 작가들 또한 자신이 제안하는 문화생산이 작동되는 좌표를, 그것을 통해 기여되는 의미를, 그것을 넘어 연대되는 지점들을 가늠하고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는다면 결국 과거 문화공보의 어휘와 크게 달라질 바 없는, 교류-없는 교류전, 연구-없는 연구전, 전시 아닌 홍보 행사에 저도 모르게 복속하게 될테니 말이다.
전시를 지연시키는 동안, 비전문가임을 인정하는 동안, 긴급한 목적 없이 느릿한 호기심을 키우는 동안, 해야 할 일들이 우리에게 아직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