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상황과 형편 따위는 잠시 넣어두고, 훗날의 내가 마주해야 할 시간과 장소를 충동적으로 정해 버리기. 결정적 순간에 준비 해오던 것들을 맥없이 허물어뜨리고 도망가기. 어느 틈엔가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떠맡고도 큰 소리치기. 평온한 생활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질긴 습성들이다. 그로 인해 겪어내야 할 곤경과 민폐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삶은 이어지고 기어코 살아진다. 그리고 더러는 그 무료함과 번다함 속에서 특집과도 같은 삶의 순간이 찾아온다.
올 해 초였던 것 같다. 인터넷을 하다 눈에 들어온 새로운 해찰거리는 밴드 Tenacious D의 콘서트 소식이었다. 런던 웸블리 구장에서 예정된 콘서트의 티켓팅을 결정하기까지 대단한 시간과 신중함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몇 단계의 검색을 거친 후, 만일을 위해 콘서트 메이트의 좌석까지를 포함하여 두 장을 표를 사두었다. 5월 말에서 6월 초라면 어쩌면 일년 중 분주할 시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탈출 하고픈 충동 앞에 경솔함은 늘 신중함을 앞지른다.
뮤지션보다는 배우, 그것도 희극적 캐릭터의 배우로 널리 알려진 잭 블랙 JB과 그의 오랜 음악적 동료인 카일 개스 KG로 구성된 록 밴드, 터네이셔스 D의 신보 “Post-Apocalypto” 앨범 발매를 기념하는 전 유럽투어의 서막을 알리는 콘서트다. 줏대없이 이 세상 모든 음악에 귀 귀울이는 잡식성 리스너이긴 하지만 특별히 애정하는 뮤지션의 공연을 위해 해외여행을 갈만큼의 열정이나 충성심이 강하지는 않다. 콘서트를 위해 일정상 무리를 해본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게다가 약간의 광장 공포가 있는 나로서는 대형 페스티벌이나 밴드 공연이 뿜어대는 강력한 열기나 사람들의 무리가 오히려 두렵기도 하다.
그저 몇 달 후 어느 순간 ‘저기 저곳’에 내가 있었으면 했다. 무대 위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퍼포먼스를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바랐을 뿐이다. 나에게 있어, 지극히 미국적인 미국사람의 원형질이자, 가장 이상적인 아티스트 모델에 가까운 잭 블랙을 런던에서 만난다는 상상만으로, 그 순간을 확보하기 위해 좌석을 클릭하는 것만으로, 필요한 만큼의 즐거움 총량은 이미 차고 넘친다.
그 시간을 기다리는 또 다른 시간들이 올해의 특집이었던 것일까.
자비없이 시간은 흘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6월의 첫 날, 나는 런던에 와있다. 와있긴 하다. 긴 비행 끝에 몸은 한없이 늘어지고, 초여름의 대기가 이렇게 뜨겁고도 차갑다니… 원래부터 에어컨 따위는 없는 런던의 낡은 지하철 공기는 들어찬 승객들로 텁텁하기 이를 데 없다. 미련스럽게 비좁은 지하철 내부는 같은 날, 같은 웸블리 파크에서 콘서트가 예정된, 이제와 더 이상의 수식어가 필요 없게 되버린 BTS의 다국적 팬들로 가득하다.
쇼! 음악중심 방송 녹화가 있는 날 DMC 역 주변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지하철에서 황급히 빠져나와 웸블리 구장까지 이어지는 1km 남짓 되는 길을 헉헉대며 걷는다. 대부분은 십대처럼 보이는 동유럽, 북유럽, 인도파키스탄 계열의 영국 소녀들, 그리고 아시아의 소녀들을 지나쳤고 (소년들이 있었던가?) 엄청난 경찰과 경호 인력을 목격하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경유하였던 베니스 마르코폴로 공항에서 함께 런던행 비행기를 기다렸던 슬로베니아 자매들을 혹여 마추칠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형형색색의 무지개 머리와 어딘지 국적불명의, 그러나 한편 모두 비슷해 보이는 스트릿 룩을 장착한 전세계 소녀떼 속에서 그녀들을 찾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국제선 비행기가 난생 처음이라던 소녀들보다, 아연실색한 것은 바로 나였을 것이다. 이곳에는 나는 이방인이다. 터네이셔스 D 콘서트가 이곳에서 열리는 것이 맞기는 한 걸까. 세상의 모든 에네르기가 초 집중된 BTS 콘서트 날, 왜 JB를 찾아 여기까지 왔을까.
근처에 있는 공연장을 바로 앞에 두고도 찾지 못해 한참을 돌고 돌아, 어딘지 이질적인 분위기의 한 무리들을 발견하고서야, 입장대기줄에 슬며시 합류할 수 있었다. 앞서 목격했던 줄에 비하면 소박한 수준이다. 갑작스레 운집한 인파로 인한 통신 장애가 있었던 이 날, 수천 소녀들을 뚫고 몇 시간 내내 줄을 섰던 탓일까. 한껏 기가 빨리고, 너덜해진 컨디션으로 가까스로 지정석에 앉아 있었다.
여섯 시로 예정된 콘서트는 여덟 시를 가뿐하게 넘기고서야 시작되었다. 그나마 첫 삼십분 동안은 미국의 컨트리 뮤직 밴드가 채웠지만 어느 하나 보채거나 불평하지 않았던 것, 본래 준비된 공연과 두어 곡의 서비스 트랙 외에는 스케쥴에 맞춰 끝나버렸던 것, 같은 시각 바로 옆에서 진행되던 BTS의 쇼와 K-Pop 열풍에 대해서 간혹 시니컬한 농담을 던졌던 것. 그런 요소를 잠시 망각한다면 공연은 프로다웠다. 연주나 진행 면에서 완벽한 현재적 프로가 되어버린 과거의 아마추어 밴드를 지켜보는 일은 미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맨 처음 티켓을 예매했던 시점을 떠올려 본다면, 모든 것들이 예상과는 조금씩 빗나간다. 밀려드는 육체 피로와 추위 속에 그저 멀겋게 앉아 폭발하는 사운드와 정면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무대 장치를 희미한 정신으로 가까스로 지켜 보았다. 장기 투어 콘서트로 상징되는 국제적 음악산업의 한 복판으로 날아와 있지만, 긴장이나 흥분보다는 나른함과 서늘함이 몸을 휘감는다. 어느 한 순간 정말로 꾸벅 졸았던가 싶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이날의 콘서트 직관은 더 이상 무용담으로 발전할 여지가 없게 되어 버렸다. 콘서트 자체는 지나치게 문명적인 광경이었고, 기획된 경험이었다. 유독 생생했던 것은 무대나 음악 자체보다 그날 여러 곳에서 목격하고, 발견한 사람들에 관한 독특한 인상과 자태들이다.
아마도 이날의 전반적인 명암은 그러니까, 케이팝 콘서트와의 극적인 대조로 인해 더욱 두드러진 것이기도 했다. 아레나에서 만난 관람객들은 일종의 “JB 닮은꼴 모임”처럼 생각이 되었는데, 실제로 정말 몇 사람들은 흩어져 사는 JB 의 쌍둥이가 아닐까 할 정도로 유사한 생김새와 몸체, 차림새와 얼굴 표정을 한 사람들이었다. 신경 써서 차려 입은 사람도 없고, 콘서트를 온 것 인지, 맥주를 마시러 온 것인지 모를 그런 행색이다. 굳이 표준형을 찾자면 JB가 자주 입는 스타일의 데스메탈 티셔츠가 가장 어울리는 넉넉한 모습이다. 화사한 국제적 축제의 구간을 지나, 동네 펍에 온 것이라고 표현한다면, 지나치게 편향적인 그날의 풍경 묘사일까. 다들 연신내 피씨방에서 게임하는 양인들 같다. 어쨌거나 웸블리 스타디움과 아레나를 경계로 하여, 매우 인상적이며 뚜렷하게 양분된 인구학적인 분포이자 풍경이었음은 분명하다.
낯선 사람들을 관찰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오게 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은 물론 팬심 때문이다. 나와는 그 어떤 공통점도 없어 보이는 잭 블랙을 친근하게 느끼고, 그의 행보를 늘 수집하며, 일종의 존경하는 마음 같은 것이 나에게 있다. 타인을 신경쓰지 않는 자기중심성과 자기 확신의 무드, 무례할 정도의 활기찬 정동과 뻔뻔한 내면, 문명화에 미처 포섭되지 않은 야성과 욕망, 게으름과 서투름, 자아의 분출과 확장. 이런 것들은 어쩌면 내가 JB에게서 발견한 특징적인 면모이자 가장 매력적인 점들이다. 그 때문에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살면서 일정 부분 마모되어버렸거나, 애초에 상실해버린 타자성이기도 하고, 여전히 끈질기게 내면 깊숙한 곳에 들러붙어 있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콘서트를 핑계 삼아 충동적으로 기획한 얼마간의 일탈은 금새 종료되었다. 다시 분주한 일상 속으로 복귀했고, 나는 어느 때보다 착실하다. 밀린 카드 값을 갚아 나가는 동안, 또 다시 지나치게 많은 일들을 맡아버렸고, 정작 정말 중요한 일들은 비겁하게 포기해버렸고, 사이 사이, 몇 달 후에 내 자신이 감당할 또 다른 종류의 헛 짓들을 계획하는 데에 비상하게 두뇌를 쓰고 있다.
무척이나 고대했던 JB와의 만남이나 터네이셔스 D의 음악에 대한 기억은 어쩐지 희미해져 버린 느낌이다. 런던으로 가기 전, 나는 산타 모니카의 홍보 사무실로 자필 편지를 부쳤고, 올해 내가 기획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이 그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랐다. 지나친 과대망상 끝에, 혹시 직접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다면 무슨 말을 주고 받을까 상상을 해보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살면서 늘 해오던 수많은 헛 짓 중의 한 페이지일 뿐이다. 기약이나 당위도 없고, 따라서 보상이나 결과가 분명치 않은 일들. 가령 그의 밴드를 위한 재미있는 트리뷰트 전시를 만들고 한 권의 책을 쓰겠다던 황당한 욕망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책임지지 못할 일에 대한 부담과 후회 거리가 되고 말았다.
아주 가끔씩은 웸블리에서 마주쳤던 그의 닮은 꼴 팬들, 공항에서 이야기 나누었던 슬로베니아 소녀들,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마주앉았던 지친 기색의 소녀들이 기억에 스친다. 젊은 외국인이 흔해진 홍대 거리를 지나칠 때 더 그렇다. 거대한 아레나 한 구석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과 창백한 낯빛으로 앉아 있던 그날의 나처럼 이국의 아이돌 가수를 보러 이곳까지 날아온 소녀들도 어쩌면 꿈꾸던 스타가 아닌 스스로의 한 조각을 되찾으러 오지는 않았을까. 기꺼이 그, 한 조각이 되었을 그런 여정이기었기를 바라본다.
올 한 해, 일상의 순간들을 물들였던 설렘과 기대, 실망과 체념의 감정들을 다시 한번 서툰 문장들과 음표들로 되살려 보고 싶어진다. 용기를 내어, 언제나 스스로를 막다른 길까지 몰아붙이는 강박과 조급증 뒷면의 불안과 나태, 유능함으로 교묘히 치장한 내면의 목적 잃은 생각들과 망상마저도 껴안아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