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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Apr 13. 2020

안민욱: 세 안민욱의 회고-미래전

 “안민욱도, 아르스도, 아마도”

세 안민욱의 회고-미래전
3 An Minwooks’ Retro-futuro-spective


“안민욱도, 아르스도, 아마도”


 
I. 안민욱(2008- )
 
안민욱은 무해한 사람이다. 그리고 친절한 작가다.
기질이나 습성을 묘사함에 있어 더 적확한 말들이 있겠지만, 멀그스름한 그런 말들만 떠오른다. 그것은 욕망이나 사심의 온도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특징-없는" 친절함이다.1) 시류에 휩쓸려 어떤 일에 우르르 달려 드는 법도, 하던 일이 시덥잖게 느껴진다고 재빨리 안면을 바꾸는 법도 없다. 그만의 침착한 호흡이자 원만함이다. 


이러한 삶의 정서와 빠르기는 지금까지의 작업의 경로와 나아갈 벡터를 정하는 상수 값이다. 작품이나 전시의 이야기에 앞서 사람에 관한 담화를 하는 일은 공정한 이해와 평가를 훼손하기도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성, 그 위의 작은 디테일까지도 그 사람으로부터 딸려 나온 부산물 혹은 역(逆)부산물이라고 여기는 나 같은 이들에게는 퍽 중요한 이해의 대상이다. ‘관상은 과학’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작가의 인격적 기질은 때로 작업의 기초 단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개인으로서의 무해함, 작가로서의 친절함이라는 것이 자극적 벌스(verse)와 치명적 훅(hook)을 요구하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무슨 특징이기는 할까. 삶이 각박하게 치뤄지는 오디션이라면 어딘지 불리할 것 같은 안민욱의 자기계발(啓發)사를 되살피는 일은 안민욱의 안민욱-되기, 이따금 안민욱'도' 되어가는 복수의 과정들을 이해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글은 바로 그러한 용도에 맞추어 쓰여지고 있다. 비평 아닌 피어 리뷰(Peer Review)에 가까운 관찰언어.


안민욱 작가의 작업들은 일대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뚜렷한 개연성도, 우연한 드라마도 조금씩 아쉬운 데가 있다. 그러나 면면을 들여다보면 안민욱이 미술계라는 좁고 특수한 지대 안에서 적절한 이탈과 확장을 꾀하며 독자적 정체성을 연출, 수행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오산에서 나고 자란 안민욱은 (대다수의 작가들이 그러하듯) 유년기 때부터 미술에 두각을 드러냈고, EBS로 만난 밥 로스(Bob Ross)2)의 영향으로 미술학원에 등록했다고 한다. 미군 주둔지라는 점 외에 별다른 특징 없는 오산에서 유년기의 안민욱이 공군 출신의 미국인 화가에 홀리게 된 것만은 드라마적이다. 


이후, 역시나 무탈한 학창 시절을 거쳐, 대학에서 판화기법을 수련했던 안민욱은 미술 유학을 통해 조형 예술과 퍼포먼스의 시각적 언어라는 두 전공 트랙을 거치게 된다. 어쩌면, 유학은 그의 인생궤도에서 가장 박력있는 선택처럼 보인다. 안민욱은 이십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개념과 실천에 중점을 둔 퍼포머티브한 설치작가"로 변모했다. 이런 류의 기계적 요약이 결여하는 바는 “안민욱이 안민욱” 되기의 과정에서 겪었을 모종의 아노미와 컴플렉스, 도전과 응전의 방식이 정교해지는 개인의 서사일 것이다. 멀리서보면 단편선의 한 챕터, 가까이서보면 에픽인. 


안민욱 작가의 아르스, "그림을 왜 하는가"에 대한 답신, 사진출처:오산뉴스,  2014



초기작이자, 대표작에 해당하는 ‘아르스(ars) 프로젝트’는 그런 점에서 그 모든 고민들과 학습된 방법론의 자기 적용이 이루어진 예다. 예술가의 사회적 서비스와 관객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비교적 익숙해진 관계적 실천 양식이다. 여전히 특기할 만한 것은 미련할 정도의 긴,긴 호흡이다. 공식적으로 첫 번째 시즌, 여덟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아르스 계열의 작업들은 근본적으로 ‘예술가 되기’에 대한 제도비평적 질문과 ‘예술 하기’에 대한 자기 증명을 포함한다. 요컨대, ‘아르스’ 라는 가상의 구조를 빌어 평범한 사람 안민욱이 특별한 예술가 되기를 소망하며 사회적 예술의 외피와 미학적 강령들을 실연(實演)해보는 일이다. 


2008년의 작업 <예술가처럼 보이기>를 출발점으로, 다양한 사회 관계적 서비스를 제공해 온 가상의 에이전시agency이자 에이전트agent인 아르스 즉 “예술”이라는 회사명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예술의 이름은 바로 예술인데, 예술이 아니라면 별로 예술적인 것 같지도 않은 일들이 자꾸만 일어난다. 


성내지않고, 서두르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지나온 시간의 끝에 우리는 다시 아르스의 수장이자 말단직원인 안과 재회한다.

아마도, 12 Years Later!    



II. 안민욱 (2014- )
 
안민욱이 돌아왔다. 이 즈음이었으리라.
출발 지점으로의 홈-커밍, 즉 서울과 오산으로의 ‘귀향’은 어떤 분기점을 제공한다. 되돌아온 자리에서 대면한 예술 생산과 수용의 조건들은 달라진 시제에 맞는 현실인식과 태세전환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전환점을 이해하는 포인트는 유학생 미술3)가와 현업 미술가가 서있는 수평적 생태계와 그 속에서 개인이 점하는 수직적 위상에 있다. 이 즈음의 작업들은 유학 미술을 현장 미술로 옮겨와 평가의 온도를 살피고, 본래의 전략을 스리슬쩍 변경해 나가는 '모색의 과정'으로 요약된다. 
런던에서 서울과 오산으로, 카페에서 공장과 나이트클럽으로, 위치와 성격을 변주해 오는 동안 ‘아르스’는 작가의 대표작업이자, 최장기 작업이 되었다. 


2014-2016년 사이 전개된 ‘아르스 프로젝트’는 예술 사무소, 화장품과 향수 제조 공장, 나이트 클럽 등 이전에 비해서 의뢰 받은 작업의 사회적 맥락과 장소성을 선명하게 드러낸 시도들이다. 가변적 설치방식과 관계 기반의 퍼포먼스, 장소성에 대한 유머러스한 해석과 자의적 변형, 연극적 수행, 적극적 협업과 같은 요소들은 환대 받을만한 특질들을 두루 겸비한 것처럼 보인다.4)


이 시기, 아르스 바깥에서 다양한 지역성을 기반으로 독자적 작업들과 의뢰 받은 기관 협업 작업들이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른바, 작업력을 전반적으로 강화시키고, 작업의 몸체와 협업 단위를 불렸다 줄이면서 장르별로 계열화시키는 시기다. 대체로 규모와 예산 면에서 설치와 해체가 가붓하고, 언어 유희를 구사하며, 천연덕스럽게 일상의 풍경에 밀착되어 있는 작업들이다. 특정한 장소(군인밀집 도시)의 내밀한 성적 행동을 서비스 공간으로 드러낸 설치 (마스터 베이비, 2017). 시간성이 작업의 중층을 이루는 시적인 설치(습기로부터, 2018), 미술가 레지던시에서의 일시적 협업 변주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시기) 등등.


바우하우스         Bow House 가변 설치, 2015


안민욱이 속해있던 세계의 환경과 태도 설정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 저런 포석들을 두어보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껏 시도해 온 개별 작업의 특수성과 그것들 간의 연결성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르스 프로젝트가 포괄하는 관계적 서비스들이 다른 작업으로 형질을 변경하고, 의도가 말갛게 비치는 미적지근한 유머가 뜨끈한 온도로 옮겨가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들, 예술을 대하는 기저의 태도에 대해서 긴요하게 바라 볼 필요는 있다.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가치 없음에 대하여 질문하는 일련의 퍼포먼스와 설치 작업들은 실은 자신이 해 나갈 수 있는 역할론에 대한 끈덕진 질문이자 일상적 예술 실천법의 고안 행위, 성실한 자습의 과정이기도 하다. 


나아가 제도화되고, 계층화된 예술계에 대한 담담한 오기를 발사하는 최소한의 정치성이기도 하다. 안민욱 되기를 가열차게 실험하고 연습하던, 끝내 알 수 없을 전사(前史)를 더듬어가며, 웃어본다. 빙긋.

 


III. 안민욱 (2019 -)
 
안민욱도 고뇌한다. 당연한 말이라 괜스레 미안해진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때, 퍼포먼스와 관객 참여 기반의 전시를 준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에도 큰 타격감 없어 보이는 평온한 낯빛에 그만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침착한 표정 아래 잠복해 있는 고뇌와 불멸의 밤들을 가만히 짐작해본다.


작사, 작곡, 기타연주, 힙합 노래. 작년부터 근거리에서 지켜 보아온 그의 일상이다. 아르스에 투영해왔던 정체성의 확장과 예술적 가치의 확인 행위들은 어느 샌가부터 좀 더 안민욱 그 자신에게 밀착되어 보인다. 아마추어리즘을 활동상의 한 면모로써 의도적으로 드러내거나, 예술가의 다양한 부캐(부 캐릭터)-놀이를 하는 일이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뻣뻣하게 몸을 놀리며, 어눌하게 기타 코드를 짚어내며, 가느다란 성대로 노래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 어떤 영악한 '의도'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아쉬움이 우리의 몫이라면, 극복의 무게는 작가의 짐.


얼마 전 그가 보내온 노래(혹은 랩 송) <당신은 몰라>는 안민욱의 프리퀄을 들려준다.   

 
“내가 만든 가짜회사 아르스 비장하게 만들었지 그때는 불안해서 이십대에 졸업 후 백수가 될 거같아 에이 알 에스 어떻게 작가가 되는지 몰랐던 그때 당신은 몰라 예술가 만드는 프로젝트 진짜가 되고 싶었거든 하지만 대박 까였어 그림이 아니여서 그게 미술이냐고 나에게들 반문했지”
 

<당신은 몰라>, 2019.12.14


2019년의 노래는 시계를 거꾸로 돌려 십년 전 옛 아르스의 탄생설을 고백한다. 남들은 예전 작업 다 잊고, 새로운 작업 빵빵 터뜨릴 때 왠 아르슨가? (자네.) 창백한 목소리의 자작 래핑 대신 더 힙한 것은 어디 없는가? 물론, 나는 안민욱의 쑥스러운 성정과 그럼에도 “용기내어 나댐”을 적극 지지하는 파이긴 하다. 


아르스도(arsDo)의 기획안을 건네 받고서 나는 이 전시가 작가의 "때 이른 회고전", 즉 미래 언젠가 회고전의 내용이 될 과거의 시간을 끌어온 전시처럼 읽혀졌다. 회고전이기도 하고, 미래전이기도 할 도치(倒置)된 전시의 시제.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아직 전시장에 가보지 못했고, 알스지엄(arseum) 개관전 설명 때문에 너무 재밌거나 궁금해 미치거나 하지 않다. 그런데, 알 것도 같다.


전시는 저 멀리서 아직도 묵묵히 걸어오고 있는 ‘안1’과 얼마 전부터 문 워크로 제자리 걸음 중인 ‘안2’와, 옆 구르기 하며 이상한 방향으로 가 있는 ‘안3’이 한꺼번에 만나는 자리일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 아마도 미래의 또 다른 안을 만나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어제의 이해를 멀리 끌어와 지금 이곳에 투영해 보는 친절한 관객이 되어보자. 더욱 친절해 보자. 관객 없는 전시를, 퍼포먼스 취소된 날들을 함께 나며, 내일의 어떤 존재들을 만나보자. 안민욱도, 아르스도, 우리도, 아마도.



1) 작가에게 ‘특징이 없다’는 것에 담긴 함의에 대하여 몇 가지 주석을 달고 싶다. 첫째는 그와 그의 작업에 특정한 교육 배경, 지역 색, 계급적, 매체적 특징을 암시하는 단서들이 비교적 옅게 느껴지는 점이다. 둘째, 안민욱이 전개해 온 일련의 작업들이 뚜렷한 시각성을 창출하는 일, 소위 ‘시그니쳐’ 작업이라 할만한 요소들이 그다지 강력하지 않다는 점이다. 셋째, 동시대 미술 환경이 은근하게 요구하는 작업의 전략적 특질이나 방법론으로부터 슬며시 비껴가는 것 같은 인상 때문이다. 


2)1942년 플로리다주 데이토나 비치에서 태어났고, 미국 공군에 20년간 복무하였으며 1981년 미국 공군 상사로 예편하였다. 친구 Annette와 1981년에 밥 로스 클래스를 열었으며, 1983년 미국 PBS에서 방영된 '그림을 그립시다'(The Joy of Painting)라는 TV 프로그램으로 미국 내에서 유명 화가가 되었다. 로스의 그림에 눈 덮힌 산이나 침엽수림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근무지인 알래스카주에서의 경험에서 유래되었다. (설명 출처: 위키피디아, 마지막 검색일: 2020년 4월 1일) 


3)유학미술의 현장미술로의 이행은 단순한 예술가의 지리적 좌표나 생태계의 변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작업의 지속을 위한 금전적 비용과 협업망, 예술기금이나 공간 제도와 같은 행정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소위 ‘유학생 미술’이라는 것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신체를 재료 삼아 시도되는 퍼포먼스, 고현학적 수집, 탐사 행위, 장소에 적합하지만 지워져야 하는 조각적 설치, 개인적 리서치에 기반한 소규모 프로젝트 등이 일반적으로 채택되는 방법론이다. (가용할 수 있는 제도와 자본, 지성의 총량을 가늠해 봄으로써)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포기와 인정은 또 다른 틀에서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예술의 양식과 일상적 방법론의 창안과 실천을 추동하는 네거티브 에너지이다.  


4) 다양한 개별 프로젝트는 이전과는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없는’ (less) 시리즈- “뭐 없는 네 가지”, “벽이 없는”, “밑이 없는” 등의 작업들은 좀 더 조각적, 디자인적 시각성이 강하다. 반면 “합치된 납치극”은 연극적 수행이, 지방 도시에서의 커뮤니티형 작업들은 일상적 장소성에 대한 독해와 언어적/시각적 번안이 더욱 중요한 요소다.   


5) <당신은 몰라>, 작사, 작곡: 안민욱 / 노래: 안민욱(feat.김우유)

  원곡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TVu0TbxYHjE



글_조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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