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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Dec 06. 2020

루트 메탈리카 기획의 글

철의 시간, 역설의 장소

 

루트 메탈리카 - 철의 시간, 역설의 장소

Route Metallica -Iron Times, Ironic Places

 



금성, 대광, 태산, 성광, 경진, 태영....


을지로 4가 역에서 나와 대로를 따라 걷다 그 사이로 난 좁은 골목으로 들어오면 차례대로 만나는 이름이다. 서로 유사하지만, 결코 겹칠 리 없는 각자만의 상호들이다. 번쩍이고, 커다랗고, 단단한 금속성의 이름들이 서로 쟁명(爭名)하는 골목의 남다른 에너지에 매번 압도당하고 만다.


골목에 들어서서 첫 번째 모퉁이에서 발견하게 되는 ‘금성조각’의 간판을 마주할 때면 변변치 않은 한자 실력을 동원하여 몇 가지 풀이로 의미를 더듬어 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행성의 이름인 금성(金星)일 가능성 하나, 쇠로 만든 성(金城)일 가능성 둘, 아니면 쇠붙이가 부딪쳐서 나는 소리(金聲)인 것일까.


샛별, 금속의 성채, 쇠 두드리는 소리. 모두 이치에 맞는 해석이고, 서로 연결되는 의미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어 달 남짓 산림동 골목을 오가며 귓바퀴를 파고드는 소리들은 먼저 전정기관을 자극하고 신체에 각인되는 골목의 주요 기억소(記憶素)임에 틀림없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귀에 힘이 저절로 들어간다.


날카로운 굉음, 그것은 무엇인가를 자르거나 깎을 때 나는 절삭(切削)음일 것이다. 쇠로 쇠를 자를 때의 소리는 그 어떤 소리보다 예리하다. 그리고 조금 더 낮은 음역대의 소리는 아마 빠우(빠우는 잔존하는 일본식 표현이며 영어식으로 ‘버핑(buffing)’이라고도 함)나 그라인딩(grinding) 소리, 즉 금속 표면을 연마할 때 나는 소리일 것이다. 그 밖에 철컹철컹, 드르르륵, 끼이익… 기계의 메커니즘에 어두운 나로서는 이 정도의 묘사가 최선이다.


철공소 골목 안에서 ‘을지로’와 ‘철’을 다루는 동시대 미술 전시를 기획하는 첫 단계부터

줄곧 나는 ‘메탈리카(Metallica)’라는 하나의 단어, 정확히는 하나의 심상에 집착하였다. 물론 메탈리카는 메탈의 이태리어 형용사형이기도 하고, 영어로는 “금속형”(Metallic)을 의미하기 때문에 산림동 철공소 골목의 분위기를 떠올린다면 그리 생경하지만은 않은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20세기 끝자락에 청년기를 보냈을 기성세대에게 메탈리카는 전설적인 쓰

래시(Thrash, 때리다) 메탈, 혹은 헤비메탈 밴드의 이름으로 다가올 것이다. 표면을 거세게 문지르고, 단단한 것을 쥐고 패며, 날카로운 쇳소리와 디스토션(distortion)을 부러 발생시키는 ‘쓰래시’적 퍼포먼스는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여러모로 산업 시대의 중공업과 반복적 노동의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전성기라 할만한 80-90년대의 높은 인기를 방어하지 못하고 새로운 트렌드에 밀려 한때의 음악으로 퇴조해 가는 수순 또한 골목의 융성과 쇠락을 덧입혀보게 한다.


도심의 정 가운데를 관통하는, 1마일이 채 되지 않는 거리의 상점가와 모세혈관처럼 좁게 굽이지는 골목길의 정경은 미술 전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어떤 스펙터클보다 강력한 시청각적 통로이자, 다층적인 공간 풍경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며 형성된 일종의 도시 공업 클러스터인 을지로 생태계는 큰 진폭으로 흔들리고 있다.


한 편에서는 도시의 가장 안쪽에서 외곽으로 떠밀어버리는 세상의 냉기와 다른 한편으로 외지로부터 골목의 속살을 파고드는 공간-애호가들의 열기 사이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바지런히 골목길 사이로 비밀스러운 장소들을 누비는 인스타그래머들에게 이곳은 ‘인더스트리얼’, ‘빈티지’, ‘핫 플’이 되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일의 삶을 애써 수호해야 마지막 성채가 되었다.


전시란 이곳에 내려앉은 역사적 퇴적과 문화적 변동들을 파편적으로만 증거하고, 지나치게 자세하게 재현하며, 성급하게 추상함으로써 그 속에서 벌어지는 비정한 현실과 유쾌하지 않은 삶의 맥락들을 탈각시키거나 원치 않는 낭만화를 가속화하는 반 예술적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오랫동안 소란스럽고, 육중했던 철의 통로를 드나들며, 무엇인가를 만들고 나르던 사람들에게 내려앉았던 단단한 형질과 촉각들이 마모되는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누군가의 시선으로 옮겨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는 장치이기도 하다.


전시에 초대된 일곱 작가(김동해, 김준, 변상환, 이학민, 전장연, 정성윤, 최황)는 조형 작업의 재료로 금속성의 물성을 진지하게 다루거나, 장소적인 배경으로써 을지로를 작업 안에 비추고 있거나, 제작 공정상 을지로 생태계와 밀접하게 연계된 경우 등 다양한 입장과 관계성을 대변한다.


그러나 한편, 꼭 명시적 근거만으로 작업이 선정, 배열된 것만도 아니다. 각 개인은 장소와 물성을 다르게 해석하고, 다루었을 것이다. 작업의 실천적 결과물이나 작업을 경유하여 다가서고자 하는 예술적 목표 지점 또한 동일하지 않다. 공통점 보다는 차이점이 두드러진 구성은 ‘철’ 혹은 ‘금속’이 갖는 물성의 전형성을 해체하고, 형태 안에 메시지를 담아내는 방법과 태도를 견주어 보기 위함이었다.  



키네틱(Kinetic) 기계 조각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 온 정성윤의 메탈 작업은 고도로 정련된 조각적 언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매끈한 산업적 질감에도 불구하고, 정성윤이 작업은 꺼져있는 기계처럼 표정과 미션이 소거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로부터 기능과 형태, 관계적 서사로 이어지는 디자인적 합목적성을 유추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경화 과정을 지나 더 이상의 확장도 수축도 없어 보이는 검은 몸체 안에 여러 단계의 형태적 번역과 심리적 응축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투영해 본다. 앙다문 철면에도 독특한 페이소스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정성윤, Friday Chair, 2015


도시의 부유물들을 소중하게 다루어 온 변상환은 교각과 같은 대형 시설물의 하부를 이루는 형강 파편을 재료로 선택하였다. 오브제로 채택된 사물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방청 도료와 육체적 강인함을 매개로 하여 철의 흔적을 표면에 남기는 방식의 조각-회화를 시도하였다. ‘살아 있는 녹’(Live Rust)이라 명명한 작업은 가수 닐 영(Neal Young)의 실황 공연명을 차용한 것이다.


메탈 조각이 오랫동안 남성적 영역이라고 인식되어온 상황에서 전장연의 가변 설치는 공간 속에서 철이 가진 예민한 탄성과 회복성을 끄집어냄으로써 작업적 변별을 시도한다. ‘긴장 속의 균형’이라는 물리적, 심리적 조건을 조각적 설치 안에서 실험해 온 작가에게 금속성은 경화된 물성이 아닌 휘어지고 구부러지는 운동성을 내재된 상태로써 적극 탐색되는 중이다. 일종의 체육 도구처럼 보이는 조각적 사물들은 공간에 반응하면서 유연하게 표정과 구도를 바꾸어 나가고, 관람객들은 사물과 사물 사이를 가로지르며 몸을 웅크리고 확장하며 반응하게 된다.     

전장연<숨을 고르고, 정지 (Pause)>, 2020


한편 이번 전시에 초대한 작업 범주에 금속 공예가 있다. 공예 씬(scene)의 젊은 기수라 할 수 있는 김동해와 이학민이 재료를 이해하고 표현해내는 세계는 같은 세대, 같은 장르 안에서 이질적인 감성을 표출한다. 볼륨이 크고 단단해 보이는 알루미늄 주조 기법을 주로 활용하는 이학민의 작업이 기퍼니쳐와 조형적 오브제, 동화와 서브컬쳐 사이를 오가는 초현실적 컬트의 세계라면, 황동을 주재료로 다루는 김동해의 작업은 얄따랗고 재료를 연마시키고 시적으로 응축시킨 단정한 문인화처럼 보인다. 김동해의 작업은 최소화된 물성과 성긴 밀도가 어떻게 공간감과 운동감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예증한다.


이학민,  House of Curiosities, 2020


그런가 하면 금속성을 시각화하거나 재현하지 않는 유형의 작업들도 있다. 2016년 당시 을지로의 작업실에 머물던 시기, 다양한 시간대의 사운드와 이미지를 채집하여 라이브러리를 구축한 바 있는 김준은 청각적 데이터로 을지로를 재생시킨다. 그러나 한 공간에 가두어 둔 이질적인 삶의 소리들은 을지로답지 않은 것 투성이다.


김준, <다른 시간, 다른 균형>, 2016, 2020


골목의 내밀한 풍경을 담기보다는, 골목 바깥 대로변의 교통, 지형 데이터를 활용하여 타임랩스 영상을 새롭게 구성한 최황은 내부의 골목을 접근 불가한 상태로 설정하고, 외곽만을 반복·순환하는 역설적 태세를 취한다. 10여 년 간의 을지로 일대의 변화 과정을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지형 정보만을 활용하여 담담히 영상의 리듬을 이끌어간다.


최황<사건 지평선 >, 2019  <Once upon a time in Seoul>, 2020


전시를 통해 셀 수 없이 다양한 물류와 인력, 무명 노동의 통로였던 을지로 골목들을 드나들며, 무엇인가를 부단히 만들고 어디론가 나르던 사람들에게 내려앉았던 단단한 형질과 날카로운 촉각들이 마모되는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조형 언어로, 굴절된 시어로, 관찰의 기록으로, 미묘한 개인의 서사와 몸짓으로 옮겨가 보고자 하였다. 전시를 구성하는 각 작업은 조각의 유물론적 몸체, 흔적으로써 대상을 증거하는 평면, 시간과 공간의 미메시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다양한 층위의 메탈리카들 즉, 사운드, 빛, 움직임, 구체적 실천과 정동을 표상한다.



철의 시간은 을지로 골목이나 그 어딘가의 시간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힘차게 두드리며, 쉼 없이 쓸모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내고, 거친 것들을 매끈하게 연마해온 시간이 있다면 그에 대한 마땅한수사일 것이다. 전시의 물리적 배경이 되는 을지로의 장소성과 골목 안의 존재들, 그들과 우연한 시공에서 맞닿을지 모를 창작자들의 고민과 실천, 전시를 준비하고 만들어 가는 다양한 이들 사이에 얼마만큼의 오해와 혼선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분명하다.


골목 바깥을 울리는 기계 소리의 볼륨이 커질수록 누군가는 온 신경을 다해 일하고 있다는 것.


밤 사이 해사한 안면으로 단장한 공간들이 들어차도 머지않아 도시의 운명과 함께 어디론가 밀려가고, 누군가는 딸려 들어온다는 것.


‘지금 여기’가 얼마나 역설적 장소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시끄러울수록 조용한 골목길, 이곳이 ‘루트 메탈리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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