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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Oct 14. 2020

Rendez-vous : 섬 쪽으로, 바람에 실려

자우녕 작가 개인전 수록 비평글

Rendez-vous : 섬 쪽으로, 바람에 실려


 

이따금씩, 얄따랗게 이어져 온 작가 자우녕과의 랑데부(rendez-vous) 안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스쳐 지난다. 작가를 떠올리면 어릴 적 먼 곳으로 떠났다던 고모 같기도,  대화의 수는 적었지만 유독 자별했던 고교 은사님 같기도 했다. 만남과 헤어짐에 다급한 이유를 대지 않고, 격려도 위로도 쉽게 건네지 않는 대화의 온도가 그랬다.


‘섬은 상징이 되고, 상징은 섬이 된다’라는 문장이 실려 왔다. 짤막했던 봄 기운이 초여름의 열기에 밀려 퇴조할 무렵이었고, 꼭 그다운 전시의 제목이었다. 자우녕 작가의 소식은 ‘전달’ 의 공무나 ‘초대’와 같은 사교의 언어가 아닌, 무엇인가에 ‘실려왔다’ 거나 어딘가에 ‘묻어왔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올해 들어서 그는 파도와 바람에 관한 이야기를 전자메일 편에 혹은 우발적 만남을 통해 전해오곤 했는데, 희미하게 이어져 온 교유 안에서도 늘 다음과 그 다음을 기다리는 선선한 갈망이, 묵묵한 궁금증이 인다. 서로 다른 둘이다. 분주한 삶의 목적이, 예술의 성취에 대한 깨달음이 살아온 시간과 경험의 온도만큼 다를 것이다.


섬과 상징 간의 순환 관계를 내포하는 그 짤막한 아포리즘이 자우녕으로부터 실려 온 것이 아니었다면 무신경하게 지나치고 말았을 일이다. 더러, 섬이라는 말은 너무 많은 상징과 은유를 포괄하는 이미지와 말의 지층이다. 인간 존재, 삶의 장소들, 사람의 역사, 신화적 탄생과 인간적 절멸, 영원의 고립과 잠깐의 접속을 논하기 좋은 그런 말이다.


나에게 섬이란 그저 땅에서 떨어져 나온 지리 좌표가 아니라 아주 깊은 곳부터 솟아난 대지, 혹은 물에 잠긴 땅의 일부이다. 그런 점들이 작가 자신, 그의 유유한 삶의 여정과 닮아 있는 것만 같다. 원인과 징후, 근원과 표층, 신화와 일상 사이에 떠 있는 존재는 양쪽을 오고 간다. 오고 가는 양쪽 편에 자신이 보고 듣고 발견한 부유물들을 실어오고, 어디론가 보내고, 가라앉은 것들을 기어이 건져 올린다. 작가의 삶이, 자우녕의 일상이 그렇다라고 나는 이해하고 상상하고 있다.    


멀리 비껴선 곳에서 그가 두 해 째 섬과 뭍을 오가며 지내고 있다는 것, 별안간 솟아나거나 저 아래 잠겨 있는 것 사이의 시간을 모으고, 사람을 만나보고, 남들은 도통 모를 어떤 일들을 추적해가고 있으리라는 것 정도. 그저 미루어 짐작해 본다. 그리고, 자우녕의 ‘섬’이 은유하는 것들의 의미론을 살피기에 앞서 물리적 토양으로서의 ‘섬’ 그 자체, 혹은 그곳에서의 구체적 시간들, 직정한 공간 경험에 철없는 서정을, 과잉 망상을 덧대어 보기도 한다.


봄에서 겨울까지 수십 개의 절기, 매일 매 순간마다 달라지는 섬의 온도와 습도를, 예민한 피부와 구부러진 귓바퀴와 발바닥의 움푹 파인 곳의 감각으로 탐지했을 여러 가지를 상상으로 느껴본다. 신발 바닥에 뭉그러진 흙의 보드라움과 무른 돌 사이의 거친 기공들, 비올 바람이 몰고오는 비릿한 내음과 태풍이 지나간 후의 공기의 무게, 동틀 무렵과 황혼 녘 까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총 천연의 컬러 팔레트, 대기 원근법에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공기 냄새 같은 것들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흔하디 흔한 클리셰다.


그 반대의 감촉과 냄새도 애써 그려 본다. 습기에 슬고 열에 찌그러진 것들, 뾰족하고 날카로운 풍랑 소리, 볼품없이 튀어나와 있는 쓰레기 파편들, 부패한 물 웅덩이와 플라스틱과 합성 수지로 떠낸 것들 따위. 해양개발과 투어리즘의 파편들일 것이다. 아름다운 풍광을 배반하는 삶의 비루함과 고통들. 어쩌면 그의 시간 안에서 전자의 것들은 아침 나절의 일기나 시가 되고, 후자의 것들은 오후의 사진이나 드로잉, 경수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가 그가 있는 섬 안으로 가보지 못한 채, 그가 펼쳐놓은 작업의 풍경에 다다르지 못한 채 적어둔 텍스트 더미이다. 작가가 보내준 글과 이미지를 꺼내 읽고, 살펴 보는 일은 미리 상상해 놓은 자연 풍경과 삶의 정동이 얼마나 부박한 것들인가 인정하게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나는 순간에 포착된 과정들과 미묘하게 연출된 풍광을 자세히 뜯어 보거나 하지 않는다. 비행기와 페리를 타고 섬으로 들어 가지 않을 뿐더러, 작가와 작업에 대하여 직접적인 정보나 소상한 의견을 나누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그 모호한 시간이 퍽 좋고, 어쩔 수 없는 공간의 거리가 숨을 쉬게 한다.   


축축하고 끈끈했던 여름 기단이 이동하고 계절의 새 바람이 몰려오자, 나는 이내 장 그르니에의 섬에 관한 추천사를 썼던 카뮈의 마음에, 찬탄의 언어에 어렵지 않게 동화된다. 이미 지난 몇 달, 온 마음으로 그곳에서 작가가 흘려 보냈던 시간을, 들큰한 바닷바람에 묻어 올 나른한 문장과 몽상들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작업의 실제 이미지- 사진과 오브제, 설치 등-들은 무엇인가를 실제로 포착하거나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계절 속에 기화되어 날아가버린 것들, 액화되어 흐르는 것들, 풍화되어 닳아진 것들이 얼마간 스쳐 있다. 또 다시 약간의 상상을 더해 이슬, 안개, 노을, 바람이 묻어 있는 섬의 풍경을, 실려온 시간을 바라본다.


나는 분주한 도심 한 가운데서 어쩐지 작가가 있을 섬 쪽이라 생각되는 남서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먼 곳을 응시하는 자세를 취해 본다. 그의 글에서 읽은 적 있는 흐릴 징후들과 맑을 징조들을 떠올려 본다. 뺨에 닿는 바람의 습기와 냉기가 콘크리트 건물 사이를 지나는 흐름을, 지고있는 해를 바라본다. 그리고, 애써 의연해져 본다. 불어오는 어떤 것도, 지나가는 무엇도 막거나 가둘 수 없음을.


이것이 바람 편에 실려온 섬의 소식이다.

기약하지 않고 다음의 랑데부를 기다렸다가, 시나브로 잊어버릴 테다.


지난 시간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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