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주말 오전에 연락드려 송구합니다. 저는 전시기획자 조주리라고 해요. 엄지은 작가님 작업과 동료 작가분들이 함께 하신 올해 정독정 모임, 최근 퍼포먼스(범 없는 산에 토끼 라이브)에 대한 정보를 구하고자 합니다. 내년 봄 아마도 예술공간 에뉴얼날레 행사 관련하여 리서치 중입니다. 여력이 되신다면 세부 자료를 메일로 보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2019년 12월 8일 (일) 오전 10:51-
작가 포트폴리오를 요청하는 사무적 문자로 시작된 ‘예술근육강화’와의 만남은 올 상반기 동안 퍽 즐겁고도 고된 인연으로 이어졌다. 즐거웠던 것은 주로 나, 고된 쪽은 그들이었으리라. 작업에 대한 구체적 정보나 기획적 전략 없이 무엇인가를 함께 도모하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닌데, 그렇게 되어 버렸다.
대신 소개를 하자면 ‘예술근육강화’는 김찬우, 엄지은, 정경빈, 정윤영으로 이뤄진 대외적 팀명이자 그들이 일정한 주기로 실행해 온 연습 모임에 대한 지칭이기도 하다. 가령, ‘프랑스식자수모임’ 이나 ‘바른말 고운말쓰기운동’처럼 목적과 목표가 투명하게 드러난 그런 식이다. 불필요한 꾸밈새를 제거한 이들의 모임은 명명에서부터, 연습 진행방식, 활동의 모드까지 시종 진지하고, 열성적이며, 민주적이다.
그러나 한편, ‘연습’이라는 단어가 갖는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내재된 쿨과 뻔뻔함이 있어 보인다. 펀쿨(fun cool)의 실체는 과하지 않을 정도의 규약과 의리, 서로 간의 상호객관성과 개인과 집단 사이의 거리를 담보하려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그러니까 이 모임이 10년이상 지속되어도 자연스러운 일일테고, 며칠 후에 해체되어도 그리 놀랍지 않을 것 같다.
이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처음 건네 받은 자료는 ‘정독정’, ’홍릉홍’이라는 제목의 출판물이었다. 2018년 작가들이(당시에는 총 다섯 작가로 구성) 정독도서관과 흥릉근린공원에 모여 각각 열 번의 연습 모임을 진행한 내용에 대한 관찰 일지의 형식을 띤다. 책의 서문은 발표 주제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었고, 매주 한 번의 모임을 했고, 1시간 동안 준비한 것을 6분 동안 발표하는 방식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전에 기획된 퍼포먼스를 현장에서 수행하고, 이를 다시 텍스트와 드로잉으로 꼼꼼하게 채워나갔을 어떤 과정들을 마음 속으로 따라가며 상상해 보게 된다. 어디든 사람들이 지나다닐 정독 도서관의 무료한 구석들을 자기 식대로 매핑해놓은 ‘찬우’의 뒤를 따라다니며 곡식이 든 봉투를 응달진 곳에 숨겨도 보고, 커다란 돌이 있는 곳에서 돌아가신 고모부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찬우의 열 일곱을 청취한다. 꼼꼼한 일지이지만, 나는 또 나대로 변변찮은 상상을 더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의 일지는 ‘녹취’ 나 ‘르포’가 아니라 ‘무보’ 혹은 ‘시나리오’에 가깝다.
텍스트나 드로잉이 아닌 이들의 ‘퍼포밍’ 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 것은 ‘범 없는 산의 토끼’라는 라이브 공연 영상을 통해서였다. (2019년 6월 12일, 대학로 꼭두소극장) 요컨대, 라운드테이블 형식을 차용한 크리틱 퍼포먼스다. 늘상 쫓기듯 사느라 핵심과 요건 중심으로 사고하는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편집점도 간주점프도 찾을 수 없는, 그다지 ‘라이브’하지 않는, 생각보다 자극적이지 않는 이 공연 아닌 공연”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감정과 감상이 발생할 확률은 극히 저조할 것이다. 웹상에서 찾은 공연 자료는 아래의 초청문이 유일하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자의로 타의로 서로의 관객이었던 이들은 각각 한 명씩 범이 되어 자리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남은 세 명의 토끼는 범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동안 하지 않았던, 혹은 하지 못했던 말을 함께 나누며 범의 작업에 대한 새로운 비평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정독과 홍릉에서 이어왔던 연습의 언어와 액션이 무대 위로 올라온 이 장면을 어쩐지 정면으로 들여다 볼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와 실토하건대, 연극, 대사가 있는 퍼포먼스, 렉처 퍼포먼스와 같은 유형의 무대 관람에 대하여 좀처럼 거리감을 좁히지 못해 온 것도 있다. 공상이 들어설 자리에 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연출된 동선과 소품을 모르는 척 따라가는 일이, 지나치게 숙련된 연기를 수용하는 일이 버겁기도 하다. 실시간 퍼포먼스를 대면하는 일은 나에게 사전의 기획에서 사후의 기록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고의 지체를 가로막고, 감각적으로 반응하기를 요구하는 것 같다.
새롭게 만난 작가들과 새로운 작업을 기획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호기롭게 연락을 취해 실무적으로 조율하며, 이따금씩 만나 작업 아이디어를 논의해가는 중에도 실은 그들이 축적해온 연습의 시간을 공식적 ‘작업’으로 옮겨오는 과정 내내 주저했던 것 같다. 작업을 작업’화’하는 기획 실천이야말로 사실상 지난 몇 년간 가장 집중해 온 일이었는데, 나는 이들의 공식 퍼포먼스 <금강산 멀리 있는 조각에 머리를 자른 망나니의 엉덩이>의 초연이 있었던 6월 초까지 작가들의 아이디어와 연습 과정을 서포트하는 일 말고는 별다른 기획자적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유별나게 긴, 초현실주의 시의 한 대목 같은 퍼포먼스 <금강산 멀리 있는 조각에 머리를 자른 망나니의 엉덩이>는 기존의 연습 과정을 새롭게 꼴라쥬한 신작 퍼포먼스였다. 퍼포먼스에서 선보인 대사와 몸짓은 2018년의 연습 모임을 원전으로 하지만,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하나의 공연 안에서 서사를 이루며, 단일 공간에 네 작가가 어울려 퍼포밍을 한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전기를 맞게 되었다. 무엇보다 장소가 바뀌었다. 공연을 구성하는 씬들은 김찬우, 엄지은, 정경빈, 정윤영 네 작가가 지금까지 시도해본 작업 중에서 자주 회자하였던 작업을 서로가 선택하여 구성하였고, 금강산/멀리 있는 조각/망나니/엉덩이 등과 같은 각 작업들의 키워드는 아마도예술공간의 계단, 지붕, 사다리, 굴뚝 등과 같은 물리적 요소들과 만나게 된다.
전시를 참여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프로덕션”은 일어나기로 되어 있었다. 연습의 무대였거나, 이야기에서 언급되었던 장소들은 새로운 지형을 만나 천연덕스럽게 그때 그곳이 되었다. 다만, 수평으로 작용하던 것은 수직으로, 언덕에서 이루어지던 것은 계단으로, 지하에서 이루어지던 것은 지붕으로 올라가면서 변화점이 생겨난다. 더욱이, 독립적으로 작동되었던 개별 작업들은 무게감, 거리감, 시선, 수행자와 함께 연결고리를 찾아가며 변화된 감각으로 엮이고 바뀌었다. 어쨌거나 최종의 결과물은 예술근육강화의 탄생과 연습 과정, 변화의 역사를 전혀 모르는 관객 앞에 전달되어야 하는 일종의 라이브 무대 공연인 것이다. 전시적 요소가 더해졌다고는 하나, 이 경우 나는 여전히 뒤로 물러나 관객이 될 수밖에 없다.
6월과 7월 총 4회에 걸친 공연을 위해, 총 네 곳의 장소를 배경으로 한 연습 단계가 있었다. 공식적으로 네 명의 작가와 첫 미팅을 가졌던 서소문에 있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그리고 이후 코로나 19로 인한 온라인 화상 훈련이 이전처럼 규칙적으로 실행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의 기획 머리는 유례없이 축소되었는데, 나는 그것이 그리 좋았다. 기획은 늘 모자란 것. 연습은 과해도 좋은 것. 기획이 줄어든 자리를 오랜만에 응시해본다.
오늘의 글은 그러니까 기획자의 변도, 공연에 대한 리뷰도, 작가론일 리 없다. 만일 공연의 현장을 내가 가진 온갖 언어적 테크닉과 수사로써 생생하게 되살릴 기회가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첫번 째로 참관한 리허설에 관한 것이어야 했다. 실시간으로 대면하는 공연 예술 혹은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미술적 행위에 대한 약간의 심리적 거리감이 있었다면, 그 시간은 온전히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희귀한 경험이었다. 소수의 관객을 앞에 두고 진행한 초연과 그 이후의 공연 또한 각각 다른 이유로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비평적 언어로 별점을 매기는 평가의 방식과는 다른 성격의 감상인데, 이미 나는 기획자이기를 적극적으로 포기했기 때문에 맘 편히 주관과 객관을 왕복하며 볼 때마다 다른 포인트에서 몰입과 거리두기를 병행할 수 있었다.
여름은 진작에 끝나버렸고, 다시 겨울이 되었다. 예술근육강화의 멤버였던 김찬우, 엄지은, 정경빈, 정윤영과는 가끔씩 좋아요를 눌러주는 안전한 사이가 되었다. 작가들에 대해 갖는 애틋함의 정서는 많은 것들을 놓치고 간 지난 시간에 대한 뒤늦은 갈망, 충분히 연소되지 않은 상태로 맞이한 기획자 삶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일까.
아주 가끔씩은 떠올려 본다. 서소문 근방을 지날 때, 정독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갈 때. 경빈님 동생은 얼만큼 자랐을까, 엄지님은 요새 무슨 연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윤영님의 최근 근황과 찬우님의 디스크 상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