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r united Jan 04. 2021

시간에 눕기

190 hours

시간에 눕기
 
프리랜서 기획자로 살면서 가장 어려운 점 중의 하나는 주어진 ‘시간’을 어떤 호흡으로 살아내느냐 하는 것이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 게 아니다. 창조적으로 시간을 미, 적분하여 시간의 길이와 면적을 최대한 오므렸다 펼쳐내고, 미술의 시제를 이리저리 오가며, 지리와 장소를 벗어나고픈 초월적 욕망이 나에게 있다.


그러나 달려오는 시간을 리드하고 싶은 욕망은 결정적 순간에 무엇인가의 뒤로 숨거나 꽁무니를 빼고 싶은 나약함 앞에서 팍 수그러들고 만다. 태만함은 부지런하고, 나약함은 드세기에 나는 그것들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


지리멸렬하게 전개되었던 올 한해의 사건과 소동들은 공포와 무기력을 동반한 시간이었다. 사선死線에서 누군가의 생멸이 오가고, 이웃의 일상이 일그러지는 것을 목도하는 일은 아직 불행이 당도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동일한 공포를 전이시키고 불안을 대비하도록 한다. 불안의 정동을 잠시라도 떨쳐내기 위해 미운 것과 미워해야 할 것들을 골라내고, 냉대와 저주를 퍼붓는다. 그 상황에서 잃어버린 것이 단지 활동의 자유와 경제력이라면 그 중 다행이다.


불안에 잠식된 상태에서 빠르게 훼손되는 것은 판단력, 자존감, 여유 같은 심리적 자산이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조급하게 떠맡고, 꼭 했어야 하는 일을 가짜 이유로 회피하게 된다. 모두 나의 이야기다.


2020년은 내재된 우울과 태만을 정당화시켜 줄 구실이자 한편으로는 무너져버린 내면을 단단하게 다져야만 했던 역설의 시간이기도 했다. 많은 일들이 없어졌고, 그만큼의 일들이 솟아나기도 했다. 미술공간들이 빗장을 걸어 잠그기 시작한 4월 첫 날, 극심한 긴장 속에서 첫 전시를 올렸고, 당차게 출격하는 작가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6월의 퍼포먼스를 진행했고,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함 속에서 7월의 축제를 마무리했다. 어느 해 보다 많은 문장을 생산했고, 다정한 설득의 말을 전해야 했고, 이름 모를 많은 이들과 틈틈이 소통해야 했었다. 치열한 과정에서 얻는 일의 즐거움과 결정의 외로움, 갈등과 후회가 뒤섞인 채 계절이 두 번 바뀌었고, 지금까지의 상황이 언제, 어떻게 흘러갈 지 모르겠다. 걱정스러운 맘이 커졌다 작아졌다 요동을 친다.


최근 나는 SNS에 연재할 목적으로 작가들과 원격 협업을 통해 그래픽 노블을 집필하고 있다. ‘뮤제오 팬데믹’이라 명명한 근미래 소설 속에서 나는 전세계 미술의 대암흑기인 ‘테네브라’(Tenebra, 어두움) 7년을 기록해 나가는 닥터 쥬니어로 등장한다. 미술 바이러스가 종식되는 ‘루미노소’(Luminoso, 빛)의 해를 맞이하기까지 7년 간의 시간 동안 나는 ‘창작상실시각예술’ 연구 프로젝트에 매달리며 매일 무엇인가를 하고있다.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기꺼이 그 시간을 상상해 보려고 한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여유와 판단력, 그리고 약간의 유머를 챙기고 싶기 때문이다.


질주하듯 시간을 달려왔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마음에 숨이 찬다. 시간 위를 마냥 달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살포시 포개지 듯 눕고 싶은 마음이 든다. 또 다른 삶의 속도와 방향, 예술적 삶이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던져본다. 190, 1900, 19000. 상실과 복구, 다시 펼쳐질 시간에 대한 상상 속에 벌렁 누워 본다.  

작가의 이전글 기획머리축소, 연습근육강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