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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Dec 01. 2021

Triple Rings;

복각본들, 어제 글피로부터


 

1. 전시의 시제를 역행하는, 제자리 여정


태생적으로 전시의 시제는 회고적이다. 뮤지엄은 지나간 문명의 파편들을 붙들어 모아 지금의 시공에 드러내는 문화적 편집술 그 자체다. 담고자 하는 주제가 미래의 어떤 지점을 겨냥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좌대 위의 유물과 예술 창작품에 투영된 모든 종류의 전망적(pro-spect) 배열들도 결국 회고적(retro-spect) 유산이 될 운명 안에 속한다. 그렇게 늘 미래의 미래로 달아나 현재가 될 미래를 되돌아보고, 과거가 될 지금 이순간을 되돌아 보는 시선 속에 거듭 머무른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나는 전시 프로그램에 내재된 회고적 시간성을 적극적으로 파고들고, 이윽고 이를 역으로 반추함으로써 과거-현재-미래로 정의된 순차적 시간 항들을 적극적으로 왕복하는 것을 전시만들기의 개념적/형식적 조건으로 삼고자 한다. 같은 이유로, 시간과 시간의 표상들을 수집하는 일, 시간의 흐름을 순차적으로 증거하는 기획 양식으로부터 가급적 멀어지고자 한다. 그 보다는, 가보지 않은 미래로부터 익숙한 현재를 되돌아보며, 역방향 안에서 실격된(될) 사물들을 가상적으로 상상해 보는 것으로부터 사고의 회로를 가동하기로 한다. 고귀한 것들보다는 무람없는 사물들, 영원한 것 보다는 언젠가 사라질 존재들을 진중하게 바라보는 연습을 시작하기로 한다. 

<Triple rings;>(안)은 일련의 개념적 사투와 화해 과정을 통해 도출한 전시의 명명, 혹은 인공적인 사물의 풍경과 그 시간들을 지시하는 상투적이고도 모호한 수사이다. 전시는 동시대 디자인 전시가 갖는 실체적 모호함을 긍정적으로 활용하고, 추상적 주제로써 부여된 ‘시간의 가치’ 를 기획의 촉발점이자 작품 생산의 핵심기제로서 실험해 나가는 공동의 과정이자 경험으로 구축해 가고자 한다. 

전시의 개념과 형식에 대한 착상은 지극히 단순한 전제로부터 비롯한다. 첫째, 과거로부터 온 디자인 유산 및 원본을 모아서 전시하지 않는다. 둘째, 전시공간에서 배열된 것 사이에는 내용적 위계나 물리적 경계선, 점진적 내러티브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하나의 총체적 심상이어야 한다. 셋째, 전시 전개에 있어 중요한 개념 축이라 할 수 있는 ‘되돌아보기’의 행위를 전혀 다른 조건에서 고민하고, 실험하며, 설득해 나간다.  



2. 세 가지 시간의 고리 속에서, 

 

미래를 상상하여 기술하는 행위는 문학일까, 역사학일까, 혹은 기술과학의 일일까? 도래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예견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반성과 현재에 대한 의구심을 투영한 가장 회고적인 사유방식이기도 하다. 미래학자 피터 로리(Peter Lorie)의 세기말 저서 <미래의 역사>(History of the Future, 1996)는 2000년 이후 총 천 년 간 전개될 인류문명의 변화상을 세기 단위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그의 미래 연대기에 따르면, 세계는 지속적 사회 변동을 겪다 30세기를 목전에 두고, 새로운 과학철학과 전 인류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이러한 예견은 인류문명의 붕괴나 지구 생태의 파멸을 앞당겨 생각하는 진영의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낙관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종의 지속을 이미 상정하고 있다는 것 조차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 행위이다. 무엇보다, 1000년 단위로 세계를 조망 할 사고 능력이 우리에게는 부족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지구는 수십 억년에 이르는 지질시대 속에서 수차례의 대 멸망과 지배종의 변화를 겪어왔고, 인류사는 그에 비하면 아주 짤막한, 단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신석기가 만년 전에 시작되었고, 예수의 공식적 탄생을 기점으로 겨우 2000년이 흘렀을 뿐이다. 대자연과 인류사, 물질 문명 간의 삼각 함수를 푸는 데 있어서 인간이 환경으로부터 학습하여 인공적으로 창안한 디자인은 중요한 매개항이다. 넓은 범주에서 디자인 '적’이라고 할만한 의도와 성취를 폭넓게 아우를 수 있다면 그렇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미래적 삶의 풍경을 상상하면서 오늘 하루를 가장 생생한 세계의 분기점으로 놓고, 1000년 전과 다시 1000년 이후를 동일한 호기심과 간절함으로 그려본다. 디자인 생산과 소비의 총량도 견주어 본다. 11세기의 왕조와 31세기 미지의 세계 사이, 광대한 시간의 틈 속에서 세계와 존재에 대한 무수한 기억과 상상이 촉발된다. 시계가 없던 시공에도 시간은 끊임없이 흘렀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물리학적 함의와 종교적 해석 또한 수 차례 정정되었다. 그러나 유물론적인 시선에서 보자면 세계는 좀 더 명징하게 다가온다. 지난 천년 간 인류를 둘러싼 물건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했지만, 평범한 삶을 지탱하는 사물의 최소 가짓수는 100개 남짓, 혹은 그 이하일 것이다. 이윽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못난 것, 부적절한 것, 무가치한 모든 것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일상 사물의 탄생과 소멸, 혹은 분화와 융합을 중심에 둔 물질문화사의 관점에 기초하여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을 회고하고, 천년 후를 전망해 보는 일은 외견상 전혀 다르거나 반대되는 일처럼 보이지만 하나로 연결되는 역사적 탐구이자, 문학적 서사요, 과학적 상상이다.  

전시의 시공간적 표제로 설정된, 서로 얽혀 있는 세 개의 고리는 물질, 자연, 사람 혹은 과거, 현재, 미래, 나아가 생산, 유통, 소비에 이르는 순환적 관계에 대한 통속적이지만 그만큼 확고한 표상이다. 



3. 레플리카: 사물의 죽음, 소멸을 유추해 내기  

 

<Triple Rings;>이라는 임의적 시공간 프로그램을 통해 나는 사물의 죽음을 통해 탄생을 기억하고, 사라짐을 통해 존재를 유추해 내고자 한다. 전시 만들기의 동력을 기획자 개인의 관성화된 창의성이나 협소한 지식지에 기대지 않는 것은 최소한의 원칙, 그리고 일말의 윤리다. 전시가 확정된다면 기획자와 연구자 집단, 참여 디자이너 간의 협력, 비교 연구를 통해 향후에 ‘사라질 사물, 물질, 디자인 행위’를 넓은 시각으로 집중 조사하고 구조화, 목록화 한다. 이런 식의 접근과 실천은 과학적인 논증과 시계열적인 목록화에 따른 결과물이기 보다 디자인적 상상력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 생명을 대하고 사물을 소비하는 윤리를 매개로 이루어 지는 집단적 추론, 투영적 과정이 될 것이다.  

‘사라질’ 것, ‘사라져야 할’ 것, ‘사라지고 말’ 것에 대한 집중적 탐구는 시간의 통로 안에서 과학기술의 발전과 생태적 이유로 소멸되고 도태되는 디자인에 대한 비극적 전망일 뿐만 아니라, 디자인된 사물과 행위 속에 투영된 당대인들의 가치와 집단의 욕망을 추적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오랜 시간 동안 무시와 저항을 이겨내고 기어이 잔존하는 물건들과 사물의 풍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가치평가이기도 하다. 사랑받지 못했지만 오래 살아남은 물건들과 널리 환대 받았지만 폐기된 물건들 사이에는 수많은 소멸의 당위와 생존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디자이너들의 시선은 사라짐을 전망하는 온 과정에서 핵심적 길잡이가 되 줄 것이다. 인류의 생존을 구성하는 의,식,주 외에도 도시 환경, 기술 혁신, 물질문화의 변동, 장식적 행위, 관혼상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의례 제도, 동식물을 포함한 생태계 전반에 대한 인식 등 다양한 축을 적용하여 100가지 소멸품 목록을 완성해 나간다.   

사라진 사물의 풍경을 복구하기 위한 기억 궁전의 회로 속. 그 처음과 끝에는 시계와 불꽃이 있다. 둘다 인류문명의 출발과 기술진보의 상징물이지만, 각기 다른 세계의 시작과 끝을 표상한다. 시계는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기술 문명의 요체이자 미분화된 세계에서 노동의 분화를 견인한 제도의 표상이자, 세계를 표준화 시킨 제국적 발명품이다. 그리고 저 멀리 타오르는 불꽃. 광대한 시간을 거슬러 가면 인류를 행성의 지배종족이자 신의 ‘복각판’으로 격상시킨 무시무시한 힘. 환한 빛과 따스한 열기로 집과 공장을 밝히고, 도시와 대륙을 연결하며, 우주바깥으로 뻗어나가게 하는 화석 연료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것들은 시계와 불꽃처럼 양가적 가치를 지닌 무수한 사물들로 구축된 풍경이다. 

전시는 이미 오래 전 시계와 불꽃이 사라진 세계에서 지금의 풍경을 회고한다. 기계일지 생명체일지 모를 소멸학자 J의 목록에는 한 세계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2020년 어느 하루를 기점으로 10세기 동안 스리슬쩍 자취를 감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100여 미터에 이르는 긴 회랑에는 옛 것들이 새로운 재료와 제작법으로 복각되어 한 데 모여있다. 기다란 골프장처럼 조성된 인공적 랜드스케이프 위로 스토리지가 축조되어 있다. 갸냘픈 상상의 가지를 쌓아올린 미래의 ‘기억 궁전’인 셈이다. 31세기의 공간은 그 자신의 시간을, 시간 속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오래전에 상실된 인공의 풍경과 본 적 없는 사물의 형태와 기능을 복각하여 드러내는 역설적 시간 장치가 된다. 전시에서 소환된 사물들은 광대한 시간을 상상하고 서로 이어 붙여보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관람자들 또한 물건과의 시간적 거리가 발생한 이 복잡한 여정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끼어들어야 하는 이상한 미션을 부여받게 된다.  


전시의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다. 


몇 차례의 기후 변화와 급진적 사회 변동을 거치며 우리가 알던 세계의 규준과 규범들이 붕괴되었다. 천년 간 전개된 사상의 변화와 기술 발전의 결과로 가장 빠른 속도로 종적을 감춘 것은 지극히 평이하고 고루한 것들, 익숙한 사물들이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의심없이 사용되던 반 생태적 물질을 재료로 한 사물들, 화석연료 기반으로 제작, 운송되는 일상의 물건들의 폐기는 필연적 과정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귀하게 보존할 이유가 없는 물건들은 22세기에 빈티지가 되었고, 24세기에 앤틱이 되었고, 25세기 이후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J는 이미 사라져버린 물건들의 소멸 연대와 그 이유를 조사하는 일을 맡고 있다. 단서는 두서없이 남겨진 사진 이미지와 도면, (지금과 달리) 여러 언어로 기술된 텍스트 정도이다. 지난 몇 년 간 그가 찾아낸 백여 가지에 이르는 과거의 사물들을 지금의 방식으로 복각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핸드 메이드‘, ‘민속적/이국적 디자인‘, ‘남성-여성, 어린이 –노인‘ 등 지금은 없어진 성차와 가족, 자연적 탄생과 노화, 공동체의 원시적 개념을 반영하는 물건들과 동식물 등에 투영된 당시의 디자인 행위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이유를 찾는 것이 그의 미션이다. 


전시를 채울 창작품으로서 레플리카들은 정교하게 계획한, “제대로 못 만든” 디자인의 오류 값이다. 복각판 혹은 복각본의 사전적 의미는 ‘원형을 모방하여 다시 판각하는 것’으로, 레플리카의 지위는 태생적으로 불온하다. 오리지널 디자인에 대한 기념행위로서 동일한 문법으로 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원본도, 원본의 대체품도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형태적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원본과 레플리카를 구분 짓는 것은 아주 근소한 디테일의 차이, 그리고 시간적 격차에서 생겨나는 근본적 타자성, 낯선 두려움이다. 

31세기에, 사라진 21세기 전후의 물건들을 되살리는 이유는 몇 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다. 근본적 추동은 사라진 것에 대한 ‘호기심’, 지나간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일 것이다. 매립 양이 한계에 달한 광물자원과 물질 자원, 오래전 금지된 화석 연료와 반 생태적 합성 물질, 소와 돼지, 참치 등 사육과 어획이 금지된 동물 자원은 역설적으로 신소재 개발과 친환경적 제작기술의 발전을 견인한다. 인류는 너무 늦지 않는 시점에서 영리한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옛 사물에 내재된 사물의 광휘와 사회문화적 기호로서의 가치, 정교하게 분화된 기능, 과도한 장식성과 유아적 특질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갖가지 사물의 기능과 통신이 통합되고, 환경 안으로 흡수된 세계에서는 사물이 갖는 물리적 돌출성도, 제작의 흔적을 나타내는 접합의 지점도, 특유의 온도와 아우라, 성애적 매력이 전적으로 소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장 화려하고도 매끈한 미감으로 사물의 표면을 새기고, 비밀스럽게 내부를 채우고, 사물과 공간 안에서 제왕적인 건축 텍토닉을 발휘하는 디자이너들- 건축, 산업, 인테리어/익스테리어, UI, UX, 재료, 가구, 의복, 식재, 디지털 그래픽, 사운드와 모빌리티 디자이너들 – 과 함께 저 멀리로 달아나, 눈 앞에서 현존하는 사물을 다시 복각해 보기로 한다. 복각판을 만드는 행위는 디자인으로부터 멀어지기, 사물의 당위를 부정해 보기, 시간에 부여된 가치를 외계적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어려운 실천이기도 하다. 고장 난 채로 시계가 돌아가고 있는 듯한 오늘날, 이 전시를 만들고자 하는 이유다. 


https://www.youtube.com/watch?v=AWYgWDmY7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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