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은 회화 작가일까? 지난 몇 해 동안 작가 최선을, 그리고 그가 전개해왔던 작업들을 마주하며 종종 그런 질문을 품곤 했다. 동시대 미술에서 작가가 다루는 매체가 창작자의 세계로 진입하는 유일한 열쇠도 아니요, 그가 매체 탐구에 집중하는 작가도 아니기에 앞선 질문이 그리 중요한 질문일까 싶다. 그러나 이번 전시 <독산회화> 준비 과정을 따라가 보며 이번에도 비슷한 의문점을 쏘아 올려 본다. 다만 질문은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말하는 ‘회화’란 전통적 의미의 평면 작법을 부정하고, 공유된 지식지로서의 미술사를 선회하며, 그린다는 행위를 교란하고자 하는 일종의 수사인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작가 최선이 그려내고자 하는 회화성의 실체는 무엇일까? 확장된 회화로서의 비평적 탐문, 지역의 역사문화적 연구에 기반한 로컬 예술의 생산, 도시 고고학 행위로서의 작가적 수행 등에 대한 여러 가능성에 대해서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작업들을 톺아보기 전에 스치는 생각들이다. 일견 미술의 일처럼, 담론의 어휘처럼 기술된 이러한 예단들도 결국은 최선이라는 인물에 관한 도해에 필요한 작은 실마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러모로, 최선은 돌출적인 작가다. 실천의 과격함으로, 질문의 투명함으로 내리꽂히는 질문들이 때로 불편하고, 반면 통쾌하다.
최선이 평단과 대중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즈음을 떠올려 보았다. 원경에서 단순하지만 때로 서정적으로 떠오른 시각적 환영과 근접했을 때 인지되는 소재와 안료와 같은 매체의 기원, 그리고 그로 인해 훼손된 의미 사이에서 증폭되는 심리적 충격은 작업 매커니즘 중 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흰 뼛가루와 소금, 붉은 잉크 범벅의 돼지 껍질, 기름 덩어리, 오염된 물, 김칫국물, 모유와 같은 지극히 물질적이며 실체적인 것들의 표면 너머의 문맥들을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특정한 표면을 만나 뒤엉키고, 착색되고, 흔적을 남기는 방식으로 회화적 인덱스를 모방하지만, 일련의 실천들이 회화의 형태를 경유한 작가적 퍼포먼스이자, 회화를 둘러싼 지식과 경험, 가치 평가에 관한 집단성을 해리시키는 과정임을, 또한 눈치채지 않을 도리가 없다. 부패하고 소멸되고 풍화하는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파워풀한 회화 상태로의 재귀, 그것이 다시 예술 시장에서 관람객의 환대를 받으며 자본에 의해 유통되고 소유될 수 있는 한 점 가능성. 오래전 역사화를 끝마친 단색 회화에 대한 일종의 크리틱이자 최선식의 카운터파트이기도 한 그의 작업이 갖는 역설적 함의들은 미술 작품 안에 물질과 정신, 생산과 소비, 삶과 예술과 같은 이항 구조들을 나란히, 그리고 편리하게 투사하는 일을 더욱 난감하게 만든다.
이번에 선보이는 <독산회화>는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특정한 지역성과 그 안에서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촉발된 전시다. 몇 해 전 인근의 레지던스 공간에 입주하면서 일상적으로 마주했던 동네 풍경과 사람들에 관한 기억이 시차를 두고 작업으로 이행되었다. 이번 전시는 얼마간은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을 투영한 창작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산업적 재료와 다양한 매체를 변주, 수렴시키는 점에서 새로운 변화의 지점에 와 있다. ‘회화’라는 표현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새로 제작된 세 개의 작업들은 매우 입체적인 진행 과정과 공감각적인 결과물을 포함하고 있다. 캔버스와 안료 없이 빛과 사운드, 영상을 입힌 새로운 연작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중앙부로부터 별안간 밀려 나와 생각 없이 버려지고 잊혀진 거리의 폐기물, 사고인지 미필적 고의인지 알 수 없는 거리의 행려병자들, 시대의 호흡을 따라가지 못한 채 지체 현상을 겪고 있는 도시의 잔존 영역들. 서울과 같은 호흡으로 팽창과 수축을 겪고 있는 오래된 도시에 남아있는 소규모 공단들은 이 모든 것들이 중첩되어 있기 좋은 장소다. 그 주변부를 배회하며 소외된 것들에 바지런히 좇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다. 도시인류학자, 다큐적인 시선으로 조만간 사라질 존재들을 기록하는 이들, 한참 전에 소실된 것들을 추적하며 그 주변을 맴도는 이들, 일상의 폐기물을 박물지적으로 수집하고 엉뚱한 시선으로 재창조하는 미술가. 최선 역시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상황과 입장을 견주고 자신의 어법과 철학에 맞게 가져오고자 고심하였을 것이다.
한 해 동안, 바지런히 독산동 골목을 오가며 최선의 주목을 끌었던 것은 온전히 소모되지 않은 상태에서 버려진 사물들이었다. 산업폐기물로 뭉뚱그려진 갖가지 재료들을 살펴보면, 아직은 쓸만한 것들, 한참 더 쓸 수 있는 것들이 더러 섞여 있을 것이다. 도처에 존재하는 폐기와 처분의 감각에 무뎌진 이들이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고, 그런 것들에(만) 유독 시선을 던지는 이들이 작가적 존재일 것이다. 올 가을 작가가 인근 공장에서 내놓은 폐 LED 더미를 작업실에 가져다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전기가 들어올지 아닐지 모를 의심스러운 뭉치들이었다. 그러니까 조형의 재료로 채택된 폐등이 전시장에서 환한 빛을 내뿜을지, 부분적으로만 작동될지, 점멸하는 덩어리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작가의 의도대로 혹은 의지와는 별개로, 거리에서 온 존재들이 인공적인 빛 덩어리로 이루어진 색 면을 창출해 낼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부류의 조형 작업이라 명명하고, 미술적 위상을 부여할 수 있을까. 존재의 불확실성을 거리에 내버려진 연약한 재료들로 제유해내고, 온통 미심쩍은 것들로 작동되는 미적 결과물을 스스로는 담보하지 않음으로써 작업자의 위계를 강등시키는 듯한 제스처를 통해 작가는 어떤 의도를 전하고 싶은 것일까. 작업은 하는 것이 아니라, “주운 것, 부탁하는 것, 미지의 것들과 벌이는 내기”일 수도 있다는 작가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4월의 벚꽃>이라는 부제를 단 라이트-회화 설치 작업의 기이한 서정은 여러 톤의 붉은 색 면으로 구성된 싱글 채널 영상 <Flower>(2021)로도 연결, 확장된다. 전시장 한 면을 가득 채운 색 면은 한 방울의 피가 굳으면서 검게 산화되는 과정을 파편으로 이어 붙이고, 영상으로 재생해낸 작업이다. 혈액이 응고된 정도에 따라 다른 색상 값을 가진 붉은 파편들이 수평 수직으로 이어지며 면적을 채우는 광경은 보기에 따라 아름답기도, 스산하기도 한, 죽어가는 시간의 풍경일 것이다. 사라질 존재들에 관한 집단 초상이기도 하다. 지역민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사운드 작업의 제목은 말 그대로 <소리>(2021)다. 독산을 비롯한 어느 곳에서나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름이 허명처럼 불리우고 겹쳐지고 흩어진다. 소리는 회화의 재료가 될 수 있을까. 소리가 겹치고 진동하면서 펼쳐지는 막막하고 탁한 울림을공간화된 색면으로, 구체시로, 추상적 소설로 읽어낼 수 없을까.
단 세 점의 작업으로 단출하게 구성된 이번 전시에서 전형적인 회화 작업으로 부를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빛, 색, 소리로 이루어진 ‘독산회화’ 삼부작이 휑한 공간을 어쩌면 더욱 휑하게 보이게 할지도 모르겠다. 미술 작품을 통한 숭고한 경험, 시각적 황홀경과 영적 치유, 물신적 만족을, 전시가 제공할 여지는 희박해 보인다. 최선 식의 회화 생산, 회화적 사고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약간 다른 종류의 경험일 것이다. 작업의 시간 뒤에 따라붙은 미지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작품의 곁에 서 있는 작가의 하루가 보이고, 작가가 찾아 나서고자 했던 사람들의 삶이 환영처럼 들린다. 그리고 저 끝에 우리가 마음껏 잊어버린 시간들과 사회 안에서 매몰차게 실격된 존재들이, 우리 자신이 걸쳐 보인다.
이 전시에서 최선의 최선은 아마도 차선이었을 것이다. 작가로서 그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이란 이를테면, 지나치게 사력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정당한 의미를 획득하는 실천일 것이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이미지, 안정감 있게 구축된 형상, 걸러지고 조탁된 언어는 그가 비껴간 어떤 세계의 것이다. 그 건너편으로, 거리가 그려낸 최선의 하루를, 최선이 주워 온 거리의 일생을 들여다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