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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Jul 08. 2022

퍼플 마블

Episode 1. No- where

 

Purple Marble 

 

‘부루마블’은 1982년 국내의 한 회사에서 개발한 보드게임으로, 우주에서 원경으로 바라 본 지구의 모습 ‘블루 마블(Blue Marble)’로부터 따온 명명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먼저 출시된 모노폴리(Monopoly)의 번안판으로도 보이는 이 게임의 핵심은 토지와 건물의 투자를 통해 상대를 파산시키는 신자유주의 논리와 투기 활성화를 위한 가상 화폐 발행 등 20세기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의 축도에 있다. 

40여년이 흐른 지금, 우주적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본 게임이 지닌 사회문화적 함의는 한층 짙고 풍부하다. 지나간 세기를 힘차게 견인했던 것은 전지구적 개발주의와 부동산 광풍, 항공과 통신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우주여행에 대한 열망, 문명의 영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을 포괄하는 낙관적 시대정신이자 유토피아니즘(Utopianism)의 실험 과정 그 자체였다. 녹색 푸르름을 발산하는 지구의 모습은 흠결없는 단단한 구체(球體)로, 마법사의 신비한 구슬의 심상으로, 생명 자원이 넘치는 아름다운 행성으로 묘사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원거리에서 행성을 역-조망하면서 렌즈의 배율을 확대하여 거리를 좁혀 들다 보면 사람과 사람, 마을과 도시 공동체, 국가와 대륙 단위로 전이되는 갈등과 침탈, 혐오와 보복 같은 인간사의 누추함과 눅눅함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자원 채굴 단계에서부터 내재된 자연에 대한 일방적 착취와 산업혁명 이후 오랜 동안 화석연료 기반으로 움직여 온 제조와 물류 시스템, 원거리 생태의 오염과 파괴를 근간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인지하게 될 때, ‘푸른 구슬’이라는 수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란 우스꽝스러움, 서글픔, 노스탤지아(Nostalgia) 그 어디쯤의 복합적 정동일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빈곤과 어둠을 몰아낸 20세기에 대한 역사화를 서둘러 마친 지금에서야 우리의 사랑스러웠던 행성을 채우던 여러 컬러의 팔레트들을 밀접한 거리에서 톺아보고, 단단해 보이던 구슬의 연약한 층리들을 투시해 볼 여유를 갖게 된다. 지구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이어진 기후 변화의 징후들과 쉽사리 끝나지 않을 팬데믹의 장기화는 세계의 운영 체계를 일단 멈추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역설적이게도, 오늘 하루를 망쳐버린 어제의 일들과 내일 하루를 안전하게 구동시키는 데 꼭 필요한 일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게 된 셈이다. 단단하던 것들이 무참히 녹아 내리고, 지배적이었던 종들이 일시에 멸절하고, 안전한 세계관이 훼손되는 경험 속에서 인간의 역사와 그 속에서 삭제되어온 非인간종을 대하는 이해의 폭과 깊이가 재조정 되는 그런 시간을 관통해 나가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평범한 이들에게 소외감과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일은 고도 과학기술과 디지털 통신, 미디어 진보가 가져다 준 ‘놀라운 신세계’의 실사화 만은 아니다. 끝을 기약하기 어려운 팬데믹으로 드러난 생태종으로서의 인류가 가진 근본적 취약성 이야말로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 전지구적 위기상황 속에서 극명하게 가시화된 상호 폭력성, 당위 없는 전쟁과 테러, 순간순간 마주하는 퇴행적 세계에 대한 실망이야말로 한 시대의 끝을 가늠해 보게 하는 것들이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세계의 참극과 코앞까지 다가온 이상 기후, 잠들지 않는 뜨거운 불길, 온갖 거짓 기제들을 통해 재생산해내는 혐오와 차별이 어느덧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지난 세기, 인류 공영의 낙관주의를 투영했던 푸른 행성은 이제 피, 땀, 눈물, 더위, 혐오로 가득한 붉은 행성의 모습으로 황폐화 되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세계와 도래할 인류의 운명 앞에 레드가 아닌 ‘퍼플’의 색채를 덧입혀보고자 함은 우리가 쥐어짤 수 있는 마지막 안간힘이자, 긍정 회로의 최소치일지 모른다. 퍼플이 푸른 빛에 가까운 보라색일지, 붉은 빛에 수렴하는 자주색일지 그 경계도, 파장도 모호하다. 자연에서 구하기 어려운 색인 퍼플은 오랜 동안 여러 문명권에서 고귀한 색의 상징이었고, 오늘날에는 경계를 가로지르며 다양성을 수용하는 문화적 표상을 담은 컬러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세계의 끝없는 진보와 발전을 확신하던 시기에도 차가운 시선으로 공동체의 앞날을 걱정하고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설파하던 존재들이 있었고, 모든 것들이 일시에 무너지고 망실되는 순간에도 인간이 가진 끈질긴 회복성과 놀라운 실천력을 믿고 나아가는 존재들이 있었다. 그러한 교차적 시선 안에서 가장 건강한 판단을 내리는 무리 속에 우리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총 6개월에 걸쳐 1, 2부로 구성으로 마련된 전시 <퍼플마블>은 동질적 공간 내에서, 동일한 작가 그룹이 이러한 세계관의 변동과 붕괴, 회복의 순환적 연결고리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암시적으로 표명하는 자리이다. 기획 의도에 따라 인류, 생태, 행성, 우주로 확장되는 거대 사회 담론을 작가들의 특수한 발견으로 좁히고, 동시대 미술 어법 안에서의 상상의 통로를 넓게 펼쳐내고자 한다. 

   유토피아(Utopia)의 또 다른 일면이기도한 ‘우(Ou)-토피아’는 말 그대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의미를 지닌다. 온갖 것들이 헤테로(Hetero)적인 상태로 병치, 존립하는 현실 세계에서 과연 순수한 이상향이나 절대적 디스토피아가 있을까? <퍼플마블>이라는 병합적 심상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오래전 폐기된 낙관주의를 전면 부정하고, 비관적 세계상을 시각적 형태로 강화하는 데에 있지 않다. 언제나 바라왔던 ‘저 세계’를 지금 이곳에 실재하는 ‘이 장소’로 변경해 나가는 실천적 상상력을 함께 여는 것에 있다. 각기 다른 매체와 주제를 변주하며 인간 세계의 유한함을 가공된 자연 풍경과 인공 물질의 면모로써 제시하는 아홉 작가들의 작업을 경유하며 존재와 세계에 대한 질문을 생성해 나가는 여정이 되었으면 한다. 공간 속에서 유영하는 추상적 환영들 사이로 각자의 어떤 ‘마블’을 추억하고, 정의하고, 전망해 보았으면 한다. 


글 조주리 (전시기획, 시각문화 연구 및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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