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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r united Sep 18. 2022

하드너들의 물렁하고 물컹한 오늘의 역정

을지아트센터 전시 <Hardener> 리뷰


하드너들의 물렁하고 물컹한 

오늘의 역정

 


글 조주리



새 전시를 만나러 길을 나선 주말 정오. ‘하드너’라는 말이 풍기는 묵직하고 단단한 느낌, 어딘지 결연한 기운과 달리 전시 공간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실바람도, 그 안에서의 시간도 몽글몽글 피어 오르는 오후다. 지금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을지아트센터의 설립 초기, 나는 머잖아 사라질 지 모를 철공골목에서 느꼈던 시절의 냉기와 매일 조금씩 수축되어 가는 것들의 촉감, 귓바퀴를 울리는 날카로운 기계음의 파편들을 붙잡으며 추운 계절의 전시를 만든 적이 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왔고 다시 마주한 골목의 모습은 여전하지만, 또 여전하지만도 않다. 온갖 것들이 서로 눅진하게 뒤엉키고 들러붙으면서 만들어 낸 비릿한 생활의 내음과 육중한 설비들이 내뿜는 열기가 비강 속으로 훅 치고 들어온다. 이곳에서의 전시, 그리고 도시의 틈새 곳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예술적 틈입이란 무엇을 바라며 그토록 신중하게 모의되고, 어떠한 전제를 포기함으로 인해 끝내 실행되는 것일까. 쉽게 만들어지는 전시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이리저리 튕겨내며 오늘의 전시를 마주한다.


처음, ‘하드너’란 말의 음가, ‘Harden-er’ 라는 단어의 형태와 의미소로부터 느껴지는 바는 그랬다. 부단히 수련하고 실천하는 강성 실천가들, 물컹하던 형질을 단단하게 응고시키는 매질(媒質)의 용도. 그러다, 항상 어디론가 나아간다고 믿는 세계의 리듬과 그에 맞춰 사람들이 움직이는 보폭이나 앙다문 입매같은 것들도 떠올려 보았다. 남 다르게 치열하고 드센 사회의 호흡을 감당해 내기 위해 무엇이든 지나치게 열심이거나 열심인 척하는 그네들의,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다.


당면한 현상을 떠받치는, 언제나 뒤늦은 유행가 같은 말들을 만들어 퍼뜨리기. 세웠던 전제와 목표가 옳았음을 가시적 결과로 입증해 내는 일. 그런 일이 세계의 본령이라면 예술가의 삶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을 것이다. 낯선 단어에서 파생된 상상력은 일평생 작가로 살아나가는 과정에 놓인 무수한 계단참과 그것들을 오르내리며 숨차고, 뿌듯하고, 부대끼고, 회의하는 어떤 삶의 모습까지 이어진다. 빈약한 이해력을 과장된 언어로 덧입혀보고, 다시 추상하여 압축시키는 과정에서 이내 이 전시가 결국 작품 뒤편의 제작자이자 작품과 작품, 혹은 작품과 사회공동체 사이에서 고민하고 성장하는 존재의 나약함과 강인함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촉발되었음을 짐작해 보게 된다. 전시를 보는 동안 이러한 추론의 한 줄기는 확증으로, 어떤 부분은 여전한 의문점으로, 또 다른 부분은 긍정적 기대감으로 발전한다. 물렁한 것들이 단단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모든 단단한 것들의 이전 상태, 대책없이 흔들리고 형편없이 물컹거렸던 과정을 역으로 상상해 볼 여지를 준다. 나에게 이 전시는 그렇게 오해되어, 기억에 내려 앉는다.


전시는 몇 가지 흥미로운 기획 상의 전제와 전개 상의 특징적 면모를 가지고 있다. 전시 기획자(흔히들, 큐레이터라고 칭하는)가 주도하지 않고, 서로 적당한 교분을 공유한작가들 사이에서 도출된 공동의 기획이라는 점 하나, 주제 중심의 응집력이나 서사적 연결성, 통합적인 조형적 연출을 목표로 두지 않는 전시라는 점 둘, 그리고 참여 작가들이 구사해온 조형적 방법론을 탈피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무엇인가를 실험하고자 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신작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세 번째 특징이다. 상투적인 것들을 배재하고 새로운 것들을 실험해보고자 하는 전시만들기의 책략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구도가 낯선 것만은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매일 매주 새로운 전시들이 몰아치는 오늘날 미술 생태계 안에서 각각의 특수한 방법론과 진의를 가리는 것도 벅찬 요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으로서, 그리고 유사한 일을 해나가는 동료로서 전시에 대해서 기초적인 질문을 품어보는 것은 온당한 출발점일 것이다. 전시라는 특정한 인터페이스 안에 올라 앉은 작업의 물리적 구성과 구체적 서사를 논하기에 앞서 어떠한 시공의 모멘텀이, 어느 수준의 갈급이 오늘의 이 전시를 ‘추동하고’, ‘낳고’, ‘길렀을까’ 하는 물음이다. 서로 다른 지점을 돌파해 나가고 있는 개인 단위의 미적 실천이 하나의 묶음으로 기획되고 그 안에서 분산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떠한 총체성과 공유된 정서를 획득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불행일지 다행일지, 작업은 그 자체로는 어떤 말도 들려주지 않는다. 전시란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일을 명징하게 공개하지 않는 시간적 장치다. 만일 전시에 소통불가능성이 일정한 수준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손쉬운 대사로 가득 찬 통속극일테고, 정보 과잉의 일러스트레이션이 되고 말 일이다. 때문에 상상력과 비평이 들어설 여지를 얼마만큼 두어 설계할 것인지는 온전히 직관에 의한 모험일 것이다. <하드너>는 그런 점에서, 많은 현대미술 전시처럼 전시의 출발과 진행 과정의 일부만을 암시하는 제목과 짤막한 텍스트 외에 의지할만한 정보가 충분한 전시는 아니다. 결과물로써 구현된 <하드너>는 현대적 외양과 밀도를 갖춘 기획전이자 각 작업의 조형적 특징을 적절히 연결시키며, 장소의 맥락과 물리적 특성에 어울리는 감각적인 공간 프로그램으로 평가하기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전시의 양적 소비라는 것이 작가나 작업, 장소에 관한 정보나 전시에 대한 도식이 없는 (때로 너무 강력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이들에 의해 이뤄지는 일이기에 이러한 감각적 수용과 정서적 평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어쩌면 이번 전시를 모의하고 새로운 실천을 성취하고자 한 작가들에게 중요한 평가의 준거점이자 최종적 심판의 몫은 애초에 그 누구도 아닌 작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일지 모른다. 오직 작가 자신만이 미세한 변화의 선과 방향전환을 판별하고, 고집스레 수호해왔던 작업 논리를 하루 아침에 뒤바꾸고, 그 차이를 정당화하여 발전시키거나, 혹은 별 차이 없음을 근거로 새롭게 도모하던 일들을 없었던 일로 되돌릴 원천적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전시에 해당하는 이야기겠지만 하나의 전시는 그 이전과 이후를 관통하는 이행의 궤적을 살필 수 있는 알리바이, 다음 시리즈를 예고하는 습작, 미래의 회고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발견한 최초의 프로토타입일 때 더욱 풍부한 시간성을 함축한 장치가 될 수 있다.  


공간을 살피면서 나는 앞서 언급한 여러 가능성들을 각각의 작업으로부터 필요충분 이상으로 발견하고 확증할 수 있었는데, 어쩌면 각 개인의 작업을 아주 적당한 수준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때문에 전시에 참여한 다섯 작가의 작업을 박진감 있게 묘사하거나, 무엇이 새로 시도되었고, 어떤 점이 변경 혹은 은폐 되었는지에 대한 과잉 친절 모드의 해제를 달고 싶지는 않다.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달라진 것 같은 인상에도 불구하고 어떤 작업들은 그 나름대로 기존 작업으로부터의 의미적, 형태적 유산을 안전하게 지켜내고 있었고, 거기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작업에 내재된 변화와 실험의 가능성은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되고, 어디서든 작동되고 있었을 것이다. 가시화될 타이밍을 앞당겨 썼었는지 애써 미뤄 두었던 것인 지는 알 수 없지만, 영영 알 수 없기 때문에 전시를 좇아 다니는 일상의 여행을 이어가는 이유기도 하다.


전시가 내재한 시간과 사건들의 일면만을 보고 지나치는 관찰자의 손쉬운 요약이 양해 받을 수 있다면 전시 ‘하드너’는 상당수의 작가들이 일생 동안 고민해 나가는 창작의 문제를 가장 현재적인 사건으로 재정의하고, 자기 실험의 문제를 공동의 의제로 불러와 새로운 룰을 통해 작동시켜보고자 한 연습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우리에게 그런 물렁한 시간들이, 저런 물컹한 사건들이 좀 더 풍부하게 필요했을 지 모른다. 황급히 경화되는 것들은 결국엔 무르디 무른 것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시가 끝나도 작업에 대한 작가적 고민이나 전시의 유용함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처럼 열린 결말 상태일 것이다. 매끈한 여정이 아니라 고초와 번민을 재료 삼아 끊임없이 썼다 지우다 우회하는 ‘역정’(歷程)의 길일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전시는 하드너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거듭 실패하며 겪었던 온갖 소동 중에서 여전히 도입부였노라 기록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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