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를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구체적 경험이 몸에 새겨진다. 판화가가 실천해 나가는 온 과정은 힘과 속도, 방향을 조정하는 일이다. 몸통에서 어깨로, 다시 손목을 지렛대 삼아 손마디와 손톱 끝으로 전이되는 힘을 조절해야 한다. 그렇게 단단한 표면을 떠내고, 미끄러지듯 내부로 파들어가는 특수한 감각은 몸 속 깊은, 어딘가에 남는다. 이것이 내가 판화 과정에 대하여 간직하고 있는 얄팍한 기억이자 묵직한 그리움의 정서다.
판화를 주요한 매체 삼아 활동해 온 작가 김동기를 만나기 전부터 나는 줄곧 화면에 드러난 이미지의 해석이나 주제적 함의를 밝혀내는 일 보다는 판화 표면에 응축된 힘의 상태와 원판의 무른 정도, 도구가 가진 예리함, 중추 신경과 미세 근육 사이의 신경학적 협응 같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미안하게도, 작업에 대해 궁금한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도통 알 수 없는 그런 영역의 예술 노동이 갖는 특수성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촉각적인 심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람과 생명체가 등장하지 않는 그의 작업 전반에 낮게 깔린 우울과 불안의 정서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작업을 주목하게 만드는 문학적 통로이자, 듬성듬성한 서사를 보완하여 바라보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핵심적 에너지는 그의 몸에서 뻗어나온, 놀라우리만큼 섬세하면서도 거침없이 빠르게 이어지는 선들이 이루는 면적과 양감.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억센 운동감과 이미지의 농도다.
작가로서 알려지기 시작한 즈음부터 일련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찍어낸 것이라고 하기엔 올올이 결이 서있고, 그려낸 환영이라고 하기엔 화면 내부로 뻗어있는, 얕고 깊은 흔적들이 자명하다. 손끝으로 자분자분하게 일으켜 세운 듯한 이미지의 공예적 미감, 날 선 사금파리 조각으로 무른 화면을 스치고 지나간 듯한 속도감, 사방으로 방사되는 조각도의 액션으로부터 페인터의 “자동기술”적 (automatism) 습관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보게도 한다. 정확한 사진 기억을 지닌 작가로부터 인출된 풍경에는 언제나 알맞은 긴장감과 운동감이 묻어난다. 빠르고 무념하지만 놓친 것 하나 없는 그런 풍경.
한편, 동시대 판화에는 다양한 기법적 혁신과 디지털 변이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그의 작업들을 마주함에 있어 ‘새긴다’ 혹은 ‘파낸다’ 라는 식의 전형적인 동작-용언들은 지나치게 협소한 접근이자 평면적 서술일 테다. 다만 아주 일반적인 캔버스 작업이나 디지털 툴을 보조적으로 사용하여 회화적 이미지를 생성해내는 여타의 작업에 비해 그의 작업들로부터 강인한 감각과 유연한 속도감을 훨씬 구체적으로 전달받게 된다. 표면에 묻어난 다양한 흔적들로부터 예리하게 파내는 힘과 둔중하게 찍어내는 압력을 시간의 역방향으로 복기해 보는 일은 평면과 입체, 이미지의 생산 과정과 결과값 사이에 놓인 블랙박스를 들여다 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얕기의 깊이를, 빠르기의 느리기를, 좁기의 넓기를 가늠해 보는 일이다.
최근작이라할수있는제주곶자왈의풍경연작(2017~)과잠실의아파트단지풍경속나무들을목판으로담아낸 <나무들_서울>(2020) 시리즈를들여다보고있노라면어떤변화들이본능적으로감지된다. 제작테크닉이나설치방식의변화, 주제의식의심화에대해서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태도와 작업의 호흡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작업이 발산하는 좀 더 넓어진 에너지로부터, 세계를 바라보는 관조적 태도로부터 비롯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꾸준한 작업 공정과 광폭한 몰입의 경험을 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