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대로 찾기
틀에 박힌 생활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할 일이 생긴다. 사무실 옆 빈 공간에 놓인 컴퓨터를 활용할 생각에 양해를 얻어 들어갔다. 모양은 같아도 기능은 내 능력으로 불가침이 된다. 또 직원 컴퓨터를 빌려 쓰면서 내 임무를 포기해야 함을 확인한다. 비번이 걸린 컴퓨터를 빌려 쓰는 일은 몹시 껄끄러운 일이다. 그래도 한 번에 처리하기 위해 자료와 usb를 챙겨간 것은 잘한 일이다.
봄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니 씁쓸하다. 어쩌면 지난봄도 쓸쓸히 맞았을지도 모른다. 지나가면 모두 잊게 되니 말이다. 창밖이 유난히 투명한 햇살로 가득한 날은 골목산책이라도 했지 않았던가. 봄나들이 행렬에 끼어들지 못하고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매화, 산수유 꽃에서 향기를 찾으러 애썼던 그 시절도 딱 이맘때 기분이었던 것이다. 현재도 시간의 흐름만큼 변화도 쌓여가고 있을 텐데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휴대폰에서 usb로 자료를 저장하는 방법을 배웠다. 딱 1회성 일 것 같지만 새 기능을 알았다는 것은 반갑다. 그 기능을 언제 또 쓸지가 묘연할 뿐이다. 음료를 먹으라고 주는데 입안이 텁텁하니 내키지 않는다. 그냥 간다고 나오다가 몸을 돌려 잔을 받아 들었다. 나의 근황을 묻는다. 감정을 다스리며 간단히 답했다. 그분의 몇 가지 질문이 내게 스트레스가 될 줄 몰랐다. 묻는 말에 답을 하려니 어깨가 굳어지면서 목이 메어 말이 안 나온다. 이 공간을 어서 벗어나고 싶어 얼른 음료를 마시고 일어섰다.
단체 일이니 돌아올 때는 목적지까지 교통수단 도움을 주리라 기대했다. 차마 말은 못 하고 걷기로 했다. 아침부터 내린 비가 많이 잦아들었다. 시내버스를 타나 걸어가나 소요시간은 비슷할 것 같은 애매한 거리다. 극구 사양해도 선물이라며 건강식품을 챙겨줘서 한 손에 들고 우산까지 받고 걷자니 무게 때문에 어깨가 아프다.
걷는 구간이 몇 해를 걸어서 출근하던 길이다. 한겨울 새벽 6시 40분이면 어둠과 찬바람을 헤치고 걸었고, 귀갓길은 해를 보며 걷느라 봄부터 양산을 펼쳤었다. 그 추억 속의 나도 지금처럼 우울한 날도 있었다. 집을 향해 가는 시간이 두렵기도 했었다. 모든 감정을 숨기며 사느라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육십 대가 되니 이제는 쉬어도 되지 않냐 묻는 이들에게 아직도 생활비가 필요하다 했다. 사실 매인 생활이 내게는 도피 수단의 방편이었다. 혼자 걷는 길에서 망연자실한 나를 만났다.
이십여 분을 걸어서 우체국에 도착했다. 소포를 접수하고 반송할 우편물을 접수하고, e그린 우편을 접수했더니 다른 부서를 알려준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제부터 조금 전까지 준비한 usb를 보이며 신청했다. usb로 접수가 불가하니 e메일로 보내주란다. 작년까지도 이 방식으로 처리한 일인데 여기까지 온 것이 헛수고인가! 순간 메일이라면 이미 주고받은 기록이 있어서 전달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엊그제까지 어둠에 갇힌 듯 생각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나였는데 순발력이 살아났다.
메일앱을 열고 전송했다. 하나 더 리더에게 참고하라고 보낸 주소록까지 전달하니 완벽하다. 오랜만에 일처리를 깔끔하게 했다는 기분이다. 요금 계산까지 하고 나오니 가벼워진 손 짐만큼 걸음도 가볍다.
귀가 길에 드니 복잡한 현실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이번 일처럼 결말이 있으면 좋겠다. 손에 든 우산을 접으며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가득하다. 우울한 심정을 씻어 줄 비라도 주룩주룩 내렸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