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현금을 찾기 위해 은행으로 갔다. 기다리던 중 ATM기 한 곳이 비어 있어 옆줄에 서 있는 그녀에게 먼저 하라 권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도움을 요청한다. 먼저 내 일을 보고 그녀의 통장을 받았다. 요구한 대로 통장정리를 해주자 잔액이 얼마냐고 묻더니 그 돈을 몽땅 빼주란다. 몇 마디 주고받은 말투가 어둔해 판단도 흐린 건 아닐까 의문이 인다.
이 돈을 다 빼서 어디에 쓸 건지 물으니 서슴없이 병원비 낼 거란다. 그녀의 대답을 들으면서 요구대로 해야 할지 말지 갈등하면서 순간 떠오른 것이 휴대폰이었다. 휴대폰이 있냐고 물으니 옆구리에 끼고 있던 손가방을 열고 뒤적뒤적하더니 찾아 꺼낸다.
자주 전화하는 사람과 통화를 하게 해달라고 하니 대뜸 자기를 의심하냐며 목소리를 높여 툴툴대면서 휴대폰 스위치를 켠다. 액정이 밝혀져서 나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화면을 들여다봤다. 최근 통화목록을 보니 ‘내 딸’이 보인다.
“내 딸에게 전화해 봐요?”
“대학생이라 지금 잠자느라 전화 안 받을 텐데….”
이번에도 볼멘소리를 하면서 통화버튼을 누른다. 그녀의 말처럼 열 번 정도 통화음이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의 생활패턴이니 이해가 되어 다시 최근 통화목록을 훑어보며 지인의 이름을 지정하고 통화를 하게 했다.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안부도 묻지 않고 나를 바꿔준다면서 전화기를 넘긴다.
“0 선희 님이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을 다 빼 달라는데 그래도 될까요?”
지인은 나의 의중을 빨리 눈치챘는지 망설임 없이 괜찮다면서 언니라 부르며 그녀를 바꿔 달란다. 둘이 통화를 마친 그녀는 당당하게 내게 언성을 높여 말을 한다.
“거 봐요 빼줘도 된다잖아요. 내 돈인데 왜 그래요?”
운전면허증까지 보여주면서 본인임을 입증하는데 나는 현금을 인출해 줄 맘이 일지 않는다. 그녀는 묻지 않아도 자신을 믿어주라는 듯 사생활까지 밝힌다. 수급자라서 지원금을 받고 있으며 확인된 금액도 그 돈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 달 동안 살아내야 할 돈일 텐데 모두 인출해버리면 안 될 것 같은 노파심만 커진다. 그녀는 나의 노파심 따윈 안중에도 없다. 아이처럼 돈을 빨리 인출해 달라고 보챈다. 절반만 찾자고 설득해봤지만 왜 자기를 의심하냐며 목소리만 커지고 요지부동이다. 서로 불신의 감정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한다.
일단 기계 속에 통장을 넣었다. 그리고 출금 버튼을 누르고 ATM기 거래 실행 번호를 물었다. 네 자리 숫자를 일러준다. 그것이 아니고 여섯 자리 숫자라고 하니 통통한 볼에 속눈썹 문신까지 한 큰 눈을 껌뻑거리고 있다. 그녀는 내가 안 찾아 주려고 수작을 부린다고 의심의 눈총을 쏘고 있으리라.
순간 증명할 방법으로 그녀의 통장을 빼고 내 통장을 기계에 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보게 하고 여섯 자리 숫자를 누르면서 다음 창이 열리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네 자리 비밀번호를 누르니 찾을 금액을 입력하라는 창이 뜬다. 이렇게 해야 한다면서 거래 실행 번호의 필요성을 알려줬다. 그제야 포기가 되는지 내려진 셔터를 직시하며 창구로 들어가는 문이 왜 닫힌 건지 원망한다.
“단발머리 언니가 돈 찾아주는데, 왜 오늘은 문을 안 열지.”
오늘이 토요일이라 은행이 쉬는 날이라고 알려주니 한사코 금요일이란다. 다시 휴대폰을 켜고 날짜와 요일을 확인해주니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비로소 자신만의 생각 틀에서 벗어난 걸까 출입문 밖을 직시한다. 그녀의 옆모습에서 쓸쓸함이 흐른다.
결국 함께 은행 문을 열고 나오는데 슬리퍼를 신은 그녀의 발이 맨살임이 보인다. 허탕 치고 가는 그녀가 더 안쓰러워 왜 양말도 안 신었냐고 물으니 금방 일 보고 가려고 했다면서 슬그머니 나와 눈을 맞춘다. 짙은 눈썹 아래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의 힘도 빼고 씩 웃으면서 대답을 한다. 00 병원에서 걸어왔다니 왕복 15분 거리인데 겨울 날씨라…. 내 양말을 벗어주겠다고 하니 괜찮다고 손사래를 친다. 난 발목 긴 신발을 신었고 금방 신고 온 양말이니 받으라고 두어 번 더 권했다. 속상함이 더 커서 발도 시리지 않은지 앞장서 걷는다.
대학생 딸도 있고 지갑 속에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을 정도라면 어떤 사연으로 저런 모습이 되었을까? 병원으로 가는 골목으로 접어드는 그녀의 넓은 등이 몹시 시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