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스무 살

by 황점숙

세 번째 스무 살

벽 삼면에 걸린 현수막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세 번째 스무 살’

생일 축하 상을 차리는 발걸음이 분주하다. 케이크가 중심이 되어 큼지막한 수박이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붉은 별을 새기고 중심을 잡았다. 참외, 체리 먹기 좋은 과일이 상 위에서 색감의 조화를 이룬다. 가장자리가 허전하다며 챙겨 온 짐에서 캔 음료수를 꺼내 놓고 간식으로 먹을 누룽지와 컵라면까지 준비한 먹을거리를 모두 모아 놓으니 잔칫상처럼 풍성하다.

펜션 거실 창문에 ‘HAPPY BIRTHDAY’를 붙이니 축하 박수가 절로 나온다. 일찍 벽을 차지한 현수막의 주인공 미소가 더 밝아지는 듯하다. 모임 구성원 중에 첫 번째 회갑을 맞았다. 회갑기념으로 여행을 계획했는데 사라지지 않는 코로나19 때문에 몇 차례 계획을 바꿨다. 타도로 여행을 가려던 계획을 수정해 도내 명소로 등반 계획을 했지만 이것 역시 상황이 녹록지 않아 전주시내 주변 펜션을 예약하고 모였다. 도심에서 20분 만에 도착한 가까운 거리이다. 도착해보니 짙푸른 숲과 옥정호의 푸른 물이 기분을 들뜨게 한다. 마음은 깊은 산속에 들어온 듯 설렌다. 뜰에 나와 동‧서로 방향을 바꿔가며 사진을 찍으니 유명 관광지 배경 못지않다.

경자년(2020년)은 여행 계획이 많아서 일정 조정을 고민하던 차였다. 올해 시작과 함께 코로나19의 침범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다. 사람 몇이 모이는 것도 방역당국에 역행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고 눈치가 보인다. 만남과 여행이 일상이던 생활방식을 억누르고 사는 우리들도 이제는 답답함을 호소하기보다 순응하고 있다. 그 묘책으로 최소한의 이동거리와 사람들을 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당신의 세 번째 스무 살을 축하합니다. 오늘은 인생의 가장 젊은 날.’

현수막에 새긴 문구를 보니 인생의 심장 같은 이십 대. 청춘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어디로 뻗어 나갈지 모르는 꿈과 에너지를 갖춘 나이이다. 돌이켜보니 청춘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보석 같은 시기인 줄도 모른 체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살았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생활에 매달리며 막연히 더 나은 미래만 기대했으니 말이다. 분위기를 한껏 살린 현수막의 문구를 보며 지나간 두 번의 스무 살 시절을 떠올려본다.

첫 번째 스무 살은 사회초년생이 되어서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했다. 학교에서 배운 주산, 부기, 타자 자격증을 들고 사회인이 되었다. 한자 세대였던 직장상사들이 작성한 결재서류를 보면서 타이핑해서 등사기로 밀어가며 문서를 완성하고 회계장부 정리하느라 주판으로 계산을 하며 손가락은 쉴 틈이 없었다. 직장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결혼을 하면서 살림과 육아하랴 경제활동에 참여하랴 긴 하루가 반나절처럼 바쁘게 흘렀다.

다시 시작된 두 번째 스무 살은 내게 새로운 꿈을 꾸게 했다. 글 쓰는 것에 흥미를 느껴 생활 속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써서 방송국, 잡지사에 보냈다. 때로는 방송을 타고 책에도 실렸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친구는 문학공부를 해보라며 권했다. 불쑥 친구가 한 말이었지만 그때부터 나도 꿈이 생겼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글을 쓰고 책을 엮을 수 있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행복했다. 첫걸음으로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 대여점에서 장편소설책 빌려 읽은 것이 일하는 틈틈이 매일 한 권씩 읽을 정도로 속도를 냈다. 책을 가까이하다 막연했던 꿈을 실현하고 싶어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다시 시작한 공부에 집중하는 건 소설책을 많이 읽는 걸로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전공서적을 읽고 책장을 덮으면 머릿속은 하얘졌다. 그때 함께 뭉친 스터디 멤버들과 토론하고 상의하면서 겨우 제 길을 찾아갔다. 틈틈이 글 쓰는 것도 꾸준히 하여 등단하게 되었다. 많이 부족한 만큼 더 노력했던 좋은 추억이 있는 시절이다.

대학에서 만난 그녀들과 함께한 세월이 강산이 두 번째 변해 가고 있다. 뜻이 같았고 지향하는 목표가 같아 맺어진 인연이라 세월 속에서 탐스런 꽃송이가 되어간다. 학업을 마치고 저마다 각각 다른 분야에서 사회생활을 한다. 당시 목표를 향해 협력하던 열정이 지금까지 끈끈한 정으로 남았다. 두 번째 스무 살의 자랑거리다.

음식 솜씨 좋은 동생은 음식을 골고루 챙겨 오고 안목 좋은 동생은 실내 장식하기 바쁘다. 한사코 주인공은 쉬라고 떠밀어대니 할 일 없이 웃음만 날리며 서성인다. 분주히 움직이는 동생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며 어색함을 달랜다.

커다란 수박이 등장한다, 동갑내기인 동생 남편이 선물한 둥근 수박이다. 둥근 수박을 적당히 자르더니 별이 조각되었다. 방송에서만 봤던 멋진 카빙을 선보인 솜씨장이가 있다. 길쭉한 초 여섯 개와 짧은 초 한 개가 꽂힌 케이크 먼저 중심을 잡자 수박, 참외가 옆자리에 놓인다. 그리고 하룻밤 묵으면서 먹을 간식거리들이 총집합하여 빈자리를 채우니 순식간에 근사한 생일상이 되었다.

오늘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란다. 분명한 일이다. 백세시대라는데 다시 펼쳐질 세 번째 스무 살을 계기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야 할 것 같아서 괜스레 마음이 조급하다. 스무 살은 힘이 있다. 다시 맞은 세 번째 스무 살의 이야기가 미리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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