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만이 내 세상

by 구기리

삶은 왜 이렇게 퍽퍽한 것일까.

수진은 책상 앞에 앉아 통장을 내려다보았다. 무엇 하나 제 뜻대로 살 수 없다는 게 슬펐다. 몇 해 전에 봤던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그것만이 내 세상.' 이병헌이 연기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가족.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관계. 애틋함과 실증, 연민과 연을 끊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존재하는, 미묘하고 복잡한 그 관계.'


지금의 상황이 그 영화와 퍽이나 닮아 있었다.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숨 막히게 하는 요소였다. 부양을 해야 한다는 것에 내 삶이 사라졌다. 수진이라는 존재가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내 삶을 살고자 결심하는 순간 덜커덕 걸리는 것은 언제나 가족이었다. 그렇기에 수진은 언제나 숨을 참듯 숨죽이며 살아갔다.

가끔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도피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혼자 덩그러니 놓이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망상은 현실과의 간극이 너무 커서 깊게 젖어들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수진은 스스로를 추스렀다.

매번 이런 성장통이 찾아왔다. 처음은 서른두 살 때였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이야기가 오갔을 때. 수진은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는 게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이 짐이 되어, 끝내 그 사람과 헤어졌다. 정확히는 수진이 먼저 손을 놨다. 그가 가족을 만나기 전에.

두 번째는 서른다섯 살 때였다. 얼마 모으지 못한 목돈을 가족이 요구했다. 그때 수진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돈이라는 존재 앞에서 수진은 결국 퇴직을 포기했다.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후 시간이 지나 마흔 살이 되어서야 퇴직을 했다. 정말 수진다운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불현듯 가족의 도움 요청이 왔다. 심장이 덜컥 무너져 내렸다.

매번 이 고통을 넘겼다. 넘길 때마다 매번 힘들었다. 이런 뒷바라지를 언제까지 해야 할까. 정말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은 이번 생의 업보가 아닐까 싶었다. 수진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이 문제를 풀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고. 매번 좋은 사람이 다가오면 가족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다고.


수진은 통장을 덮었다. 도망치기보다는 더 나은 방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족까지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겠다고. 그래야 다음번엔 도망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 다음번엔 손을 놓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수진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역량을 키운다는 핑계로 또다시 시간을 흘려보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결국엔 역량이 아니라 용기의 문제라는 것을.

창밖으로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수진은 핸드폰을 들었다.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또다시.

그것만이 수진의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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