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소리

by 구기리

네 개의 소개팅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민호는 카톡 알림창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시간의 틈이 있었다면 고민할 여유라도 있었을 텐데. 그럴 겨를이 없었다. 일단 만나본다. 스마트폰 속에서 네 명의 여자와 동시에 대화를 주고받는 것은 생각보다 머리를 아프게 했다. 이름을 헷갈리지 않게 조심해야 했고,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해야 했다. 다행히 한두 명과는 대화의 코드가 어긋났다. 추려졌다. 민호는 안도했다. 결국 두 명이 남았다. 혜선과 나연.


혜선과의 대화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문자 하나하나에서 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왠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었다. 만나는 날까지 주고받는 대화가 즐거웠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날 아침, 혜선에게서 연락이 왔다.

"죄송해요. 어젯밤에 차 사고가 났어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에요."

민호는 당황했다. 크게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었다. 조만간 다시 만날 날을 잡으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오후, 민호는 나연을 만났다. 혜선과의 약속이 취소되었기에 나연과의 만남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나연은 민호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했다. 대화에 맞춰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진정성이 느껴졌다. 민호는 나연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혜선과는 일주일이 지나도 만나지 못했다. 이주일이 지나도 만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주가 다 되어가는데도 병원과 집을 오가며 회복 중이라는 말만 반복되었다. 민호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이렇게 문자만 주고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졌다. 대화를 이어갈 힘도, 재료도 점점 사라졌다.

그때 머릿속에 한 생각이 사고처럼 들어왔다. 인연이 아닌가. 이렇게 만나지 못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혜선이 차 사고를 당한 것도, 어쩌면 우리 관계를 미리 알려주기 위한 신호가 아니었을까. 나쁜 일이 먼저 터진 것은 경고였던 것은 아닐까. 민호는 혜선과의 연락을 서서히 줄였다. 나연과는 자주 만났다. 거리가 가까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때로는 세 번.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산책을 했다. 관계는 깊어져 갔다. 그런데 왜일까. 깊어지는데 그 안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깊어지지 않았다. 나연은 좋은 사람이었다. 착했다. 배려심도 있었다. 함께 있으면 편했다. 그런데 가슴이 뛰지 않았다. 손을 잡아도 떨리지 않았다. 키스를 해도 어딘가 공허했다.


민호는 조용한 자기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할 말은 없었다. 생각의 늪에서 첨벙거렸다.

이성은 나연을 말하고 있었다. 착하고, 배려심 있고, 안정적인 나연. 함께 미래를 그릴 수 있는 나연.

본성은 혜선을 말하고 있었다. 만나지도 못한 혜선. 얼굴도 모르는 혜선. 하지만 문자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던 그 떨림. 만날 수 없었기에 더욱 강렬해진 그리움.


핸드폰이 울렸다. 나연이었다.

"오빠, 자고 있어요? 내일 시간 돼요?"

민호는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들었다. 카톡을 열었다. 혜선과의 대화창을 스크롤했다. 3주 전의 대화들. 설렘으로 가득했던 문장들.

"퇴원했어요."

혜선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흘 전의 메시지였다. 민호는 읽고도 답장하지 않았었다.

민호는 핸드폰을 가슴에 얹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성과 본성 사이에서,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그는 여전히 첨벙거리고 있었다. 사고는 혜선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민호에게도 이미 사고는 일어나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민호는 생각했다. 20대에는 감정이 이끄는 대로 연애를 했다. 떨림에 몸을 맡겼고, 설렘을 좇았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몇 번의 사랑을 겪었고, 그만큼의 이별을 경험했다. 이제 30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이성적이고 안정적인, 그런 연애를 해봐야 하는 것일까.

그 '해봐야 한다'는 말 속에 이미 답이 들어 있었다. 연애는 체험 학습이 아니었다. 20대의 연애, 30대의 연애. 감정적인 연애, 이성적인 연애. 그런 식으로 카테고리를 나누고 정리하고 경험치를 쌓는 게임이 아니었다.

민호는 나연을 떠올렸다. 나연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민호는 나연을 '30대의 안정적인 연애'라는 틀에 넣어버렸다. 나연은 나연일 뿐인데. 그녀를 조건으로, 카테고리로, 경험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혜선은 어땠을까. 만나지 못했기에 혜선은 여전히 '20대의 떨림'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만났다면? 실제로 얼굴을 마주했다면 혜선도 나연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더 실망스러웠을지도.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렸다. 민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자신이 만든 틀에서 벗어나는 것. 과거의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 그것이 가능할까. 아니, 가능하다 해도 자신은 그럴 용기가 있을까. 민호는 알고 있었다. 이성을 선택하는 순간,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포기가 되리라는 것을. 나연과 함께 안정적인 미래를 그려가면서도, 가슴 한구석에는 늘 혜선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아니, 혜선이 아니라 '끌림' 그 자체가 남아 있을 것이다. 결국 본성이었다. 결국 끌림이 중요했다.

이성이 아무리 옳은 길을 가리켜도, 본성이 다른 곳을 향하면 그 길을 걷는 내내 뒤를 돌아보게 된다. 손에 쥔 것의 가치를 알면서도, 손에 쥐지 못한 것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 그것이 인간이었다. 아니, 적어도 자신은 그런 인간이었다. 민호는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나연과의 대화창을 닫고, 혜선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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