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났다.
하나의 소개팅이 끝났다. 하나의 짐을 덜어냈다. 덜어낸 것은 지훈이 아니었다. 착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던 지훈은,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전하고 싶었던 말만 정리한 채 상대에게 언제 보내야 할지 타이밍만 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상대에게도 전달되었는지, 그녀가 먼저 제안했다.
"우리 이쯤에서 그만해요."
이 말을 들었을 때 슬픔보다 기쁨이 반겼다. 동시에 마음에 안도감이 찾아왔다. 책임져야 하는 말을 상대가 먼저 해준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가 따를 뿐이었다. 이렇게 비겁한 사람이 바로 지훈이었다.
애초에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그녀를 보면 마치 거울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무척이나 자신과 닮아 있었다. 단지 몇 번의 만남, 무미한 텍스트를 통해 그녀에 대한 데이터가 쌓여 갔다. 그렇게 쌓인 데이터는 뇌의 연산 처리 과정을 통해 어떠한 사람인지, 지훈이 딱 경험한 만큼의 편협한 시각으로 해석했고, 그렇게 도달한 결론은 '나와 닮은 사람'이었다.
물론 그녀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성적 끌림은 없었다. 그것이 가장 큰 오류였다. 처리하지 못한 오류. 연산 처리 과정에서 발생한 결함. 그런 것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이렇게 친구가 되는 확률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이것을 인연이라고 한다면, 또 다른 의미의 인연이라고도 불릴 수 있겠다 싶었다. 우리의 시작은 비록 소개팅이라는 감투를 쓰고 시작했지만, 그 끝은 친구로 귀결되었다. 오히려 이성적 감정을 배제하고 나서야 우린는 조금 더 진실히 서로에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인연이었다. 흔치 않은 인연.
지훈은 그녀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무엇이 그토록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었을까. 알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무수히 스쳐 가는 사람들 속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훈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맺은 관계가 지속되기가 얼마나 힘든지도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실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어렵다는 것. 나아가 그 만남 속에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지훈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한 번쯤 해봤다는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값진 경험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그 경험이 독약일지라도.
"뭐 생각해?"
그녀가 물었다. 지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닮은 얼굴. 자신과 닮은 표정. 자신과 닮은 눈빛.
"아무 생각 안 해."
지훈은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웃었다. 그 웃음이 거짓말을 알고 있다는 웃음인지, 아니면 그냥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서로 닮은 사람끼리는 생각도 닮아가는 것일까.
지훈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디쓴 맛이 입안에 퍼졌다.
사랑이 아닌 관계. 친구라는 이름의 관계.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더 좋은 것일지도 몰랐다. 사랑은 끝이 있지만 친구는 끝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사랑은 변하지만 친구는 변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훈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자기 위안이라는 것을. 사랑할 용기가 없어서 친구라는 안전한 관계로 도피한 것이라는 것을. 오류를 처리하지 못해서 시스템을 재부팅한 것이라는 것을.
"또 만나자."
그녀가 말했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또 만나."
우리는 헤어졌다. 지훈은 혼자 길을 걸었다. 저녁 공기가 차가웠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지훈은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사랑이 아닌 것으로 끝난 만남이었지만, 이것도 인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훈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자신은 평생 이런 식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사랑 직전에서 멈추고, 친구라는 이름으로 관계를 정리하고, 그렇게 안전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그것이 지훈의 오류였다. 처리되지 않은, 평생 처리되지 않을 오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