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by 구기리

지선이는 김밥을 먹다가 멈췄다. 단무지 맛이 이상했다. 아니, 단무지는 원래 이런 맛이었다. 다만 지선이는 문득 생각이 났다. 민수가 단무지를 싫어했다는 것을. 김밥집에 가면 민수는 늘 단무지를 빼달라고 했다.

"왜 단무지를 싫어해?"

"그냥. 색깔이 이상해."

"색깔이?"

"응. 뭔가 인공적인 느낌?"

그런 대화를 나눴었다. 언제였더라. 작년 봄쯤이었나. 지선이는 김밥을 다시 입에 넣었다. 씹었다. 삼켰다. 별거 아닌 기억이었다.


퇴근길이었다. 지선이는 버스를 탔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리의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지선이는 민수가 궁금했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밥은 잘 먹고 있을까. 아직도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까.

헤어진 지 석 달이 지났다. 석 달. 길다면 긴 시간이었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지선이는 민수의 안부를 알 수 없었다. SNS는 차단했다. 공통 친구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우편함에 전단지가 꽂혀 있었다. 치킨 전단지였다. 지선이는 그것을 보고 또 생각했다. 민수와 자주 시켜먹던 치킨집이었다. 순살 반 뼈 반. 콜라 두 개. 늘 같은 것을 시켰다.

"순살만 시키지 그래?"

"뼈 있는 게 맛있잖아."

"먹기 귀찮은데."

"그래서 반반 시키는 거지."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치킨을 먹었다. 맥주는 지선이가 마셨고, 민수는 콜라를 마셨다. 민수는 술을 못했다. 아니, 안 마셨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었다고 했다.


지선이는 전단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하이힐을 벗었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김치와 계란과 우유가 있었다. 저녁을 차려먹기가 귀찮았다. 지선이는 냉장고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녁 햇살이 커튼 사이로 비쳐 들어왔다. 지선이는 민수에게 문자를 보내고 싶었다. '어떻게 지내?' 짧은 문장 하나. 하지만 보내지 않았다. 보낼 수 없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민수의 번호는 아직 저장되어 있었다. 삭제하지 못했다. 지선이는 그 번호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 민수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지선이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나 여전히 나야."

지선이는 중얼거렸다. 별일 없이 똑같았다.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 잤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었다. 민수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갔다. 지선이의 하루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지선이는 민수를 생각했다. 김밥을 먹다가, 전단지를 보다가, 길을 걷다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민수 생각이 스쳤다. 그러면 지선이는 잠시 멈췄다. 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토요일 오후, 지선이는 동네 산책을 했다. 공원을 지나다가 벤치에 앉았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지선이는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민수와 여기 온 적이 있었다. 가을이었다. 단풍이 예뻤다. 민수가 낙엽을 주워서 지선이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지선이는 웃었다. 민수도 웃었다.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은 아직 핸드폰 앨범 깊은 곳에 있었다.

"나 너를 사랑하길 잘했어."

지선이는 말했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그것은 사실이었다. 지선이는 민수를 만나서 행복했다. 함께 밥을 먹고, 길을 걷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들이 좋았다. 후회는 없었다.

다만, 아직은 그리웠다. 이별이 추억이 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선이는 천천히 잊을 것이다.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아픈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해가 지고 있었다. 지선이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선이는 공원을 나섰다. 골목길을 걸었다. 저녁 공기가 차가웠다. 지선이는 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편의점을 지나쳤다. 치킨집을 지나쳤다. 김밥집을 지나쳤다. 민수와 함께 갔던 곳들이었다. 하지만 지선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걸었다.

집 앞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불을 켰다. 신발을 벗었다. 부엌으로 갔다. 이번에는 라면을 끓였다. 계란도 넣었다. 밥상에 앉았다. 젓가락을 들었다. 먹었다.

창밖이 어두워졌다. 지선이는 설거지를 했다. 샤워를 했다.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을 켰다. 민수의 번호를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리고 화면을 껐다.


내일도 해가 뜰 것이다. 지선이는 일어날 것이다. 출근할 것이다. 저녁에는 집에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한 달이, 일 년이 지나갈 것이다.

언젠가 지선이는 민수를 잊을 것이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옅어질 것이다. 그때가 오면, 지선이는 예뻤던 마음만 간직할 것이다. 슬픔은 내려놓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천천히 가도 괜찮았다. 지선이는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지선이는 민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안녕."

잘 지내,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선이도 잘 지내고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괜찮았다. 언젠가는, 정말로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웃으면서.

그날까지, 지선이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밤이 깊어갔다. 지선이는 잠들었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민수가 나왔다. 민수는 웃고 있었다. 지선이도 웃었다. 그것은 좋은 꿈이었다.


아침이 왔다. 지선이는 눈을 떴다. 새로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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