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찻잔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건너편에 앉은 남자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카페 안의 소음 속으로 흩어져버렸다. 그가 웃었다. 은혜도 따라 웃었다. 언제 웃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이십 년 가까이 살아온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재미있으시죠?"
남자가 물었다. 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세 번째 만남이었다. 아니, 네 번째였던가. 횟수조차 가물가물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은혜는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마흔둘. 그 나이가 실감나지 않았다. 스물다섯에 했던 연애와 마흔둘에 하는 연애가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사랑에 빠지는 데는 속도가 있는 걸까.
그날 밤, 은혜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스물다섯 살, 처음 만난 그 사람은 달랐다. 세 번을 만나기도 전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었다. 그의 문자 한 줄에 하루가 달라졌고, 그가 보고 싶어서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지금은. 은혜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오늘 만난 남자에게서 온 문자가 있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음 주에도 뵐 수 있을까요?" 정중하고 친절한 문장. 은혜는 답장을 쓰려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 속도는 사람마다 다른 것일까. 친구 미선은 달랐다. 작년에 재혼한 미선은 상대를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을 결심했다고 했다. "나이 먹으면 보이는 거야. 이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젊을 때는 감정에 휘둘렸지만, 이제는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잖아." 미선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은혜는 그 합리성이 두려웠다. 사랑이 계산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은혜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에어컨 바람이 차가웠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여름이었다. 스물다섯 살 여름. 대학교 앞 허름한 술집에서 처음 만난 그 사람. 그는 문학을 전공했고, 은혜에게 시를 읽어주곤 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그와 함께 있으면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평범한 가로수 길도, 낡은 버스 정류장도, 모든 것이 특별했다. 그러나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다. 졸업 후 그는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고, 은혜는 서울에 남았다. 거리가 멀어지면서 마음도 멀어졌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먼저 마음이 멀어졌는지도 모른다. 이별은 예고된 것이었고, 그들은 마지막 만남에서 울지 않았다.
그 후로 은혜는 몇 번의 연애를 더 했다. 서른 살에 만난 직장 선배와는 일 년을 사귀었고, 서른다섯에 만난 동창과는 결혼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끝이 났다. 언제부턴가 은혜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 어려워졌다. 마음을 여는 것이, 누군가를 믿는 것이,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는데, 막상 그 사람에게 빠져드는 게 쉽지 않다. 오늘 만난 남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사람이었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말투도 정중했으며, 은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조건으로 따지면 나무랄 데 없었다. 그런데 은혜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이 우연히 은혜의 손에 닿았을 때도, 그가 문을 열어주며 웃었을 때도, 은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이것은 나에게서 비롯된 문제인 것일까. 은혜는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마셨다. 싱크대에는 아침에 먹은 컵라면 용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설거지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내일 하면 되었다. 혼자 사는 집은 그래도 괜찮았다. 누구에게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누구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 적막이 무겁게 느껴졌다. 주말 오후, 혼자 소파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명절에 가족들이 모였을 때, "아직도 혼자야?"라는 질문을 받을 때. 친구들이 가족 사진을 SNS에 올릴 때. 그래서 은혜는 결심했다.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하고, 소개팅을 나가기 시작했다. 엄마도 기뻐했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네 나이면 아직 늦지 않았어." 엄마의 말에는 안도와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아니면 철부지 사랑에 멈춰버린 마음의 문제일까. 거실 벽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스물다섯 살의 은혜와 그 사람.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둘 다 웃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웃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 두근거림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은혜는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얼굴은 이미 흐릿해졌다.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의 감정만은 선명했다. 세상에 우리 둘뿐인 것 같던 그 느낌. 손만 잡아도 행복했던 그 시간.
멈췄있길래 성숙된 사랑을 거부하게 되는 것일까. 미선이 말했던 '성숙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사랑? 조건을 따지고 미래를 계산하는 사랑? 은혜는 그런 사랑이 진짜 사랑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느 심리학 책에서 읽었다. 사랑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열정과 친밀감과 헌신. 젊을 때의 사랑은 열정이 강하고, 나이 들어서의 사랑은 친밀감과 헌신이 중요하다고. 그렇다면 은혜는 지금 무엇을 원하는 걸까. 여전히 열정을 원하는 걸까. 아니면 열정 없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사랑이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전 사랑이 적용되었던 이유일까. 은혜는 침대로 돌아왔다. 스탠드 불을 켰다. 노트를 꺼내 펜을 들었다. 예전에는 일기를 자주 썼었다. 요즘은 쓸 말이 없었다. 매일이 비슷했고, 특별한 일도 없었다.
"오늘 네 번째 소개팅을 했다."
은혜는 한 줄을 쓰고 멈췄다. 그다음은 무엇을 써야 할까.
"그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왜일까."
펜을 내려놓았다. 대답을 알 수 없었다.
그때로 멈췄기에 사랑이 진전되지 못하는 걸까. 사실 은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직도 그 스물다섯 살의 여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그 뜨거운 감정, 그 순수한 열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불타는 사랑을 원해서였을까. 회사 후배 지연이가 물었다. "언니는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으세요?" 은혜는 잠시 생각했다. 키가 크고,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대화가 잘 통하고. 머릿속으로는 조건들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지연은 웃었다. "언니도 로맨틱하시네요. 조건보다 감정이 중요하다는 거죠?"
로맨틱. 은혜는 그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맨틱한 게 아니라, 그냥 솔직한 것이었다. 은혜는 여전히 가슴이 뛰는 사랑을 원했다. 계산하지 않고 빠져드는 사랑을.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까. 한눈에 빠져버리는 사랑은 이십 대에만 느낄 수 있는 사랑이기에 나이가 든 지금은 할 수 없게 된 것일까.
주말에 은혜는 엄마를 만나러 갔다. 엄마는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은 어때?"
"음, 괜찮아."
"괜찮으면 계속 만나봐. 네 나이에 고르고 고를 처지가 아니야."
엄마의 말은 현실적이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은혜는 반발심이 들었다.
"엄마는 아빠랑 어떻게 결혼하셨어요?"
엄마는 밥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때는 연애 같은 거 없었어. 중매로 만나서 몇 번 보고 결혼했지. 그래도 괜찮았어. 살다 보니 정이 들더라고."
"사랑한 건 아니었어요?"
"사랑? 그런 거 따질 형편이 아니었어. 먹고 사는 게 급했지."
은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엄마 세대와 자신의 세대는 달랐다. 엄마는 생존이 중요했고, 은혜는 감정이 중요했다. 그런데 정작 은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다.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은 뜨겁게 사랑했던 순간에 멈춰버렸기 때문일까.
월요일 아침, 은혜는 회사에 출근했다.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보니 또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은 빨랐다. 어느새 사십 대 중반이 다가오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지난주에 만난 남자였다.
"은혜 씨, 주말에 시간 되시면 전시회 같이 볼까요?"
은혜는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시간도 있었다. 그런데 선뜻 답장이 나가지 않았다. 여전히 모르겠다. 점심시간, 은혜는 미선과 통화했다.
"계속 만나보는 게 어때? 사랑은 어느 순간 갑자기 오기도 하잖아."
"그럴까?"
"응. 나도 처음엔 그냥 그랬는데, 만나다 보니 좋아지더라고. 지금은 정말 잘 만났다고 생각해."
미선의 목소리는 행복해 보였다. 은혜는 부러웠다. 미선은 현실을 받아들일 줄 알았다. 더 이상 스물다섯의 사랑을 꿈꾸지 않았다. 어영부영 사랑을 시작도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갈팡질팡하게 되는 이유는 혹시나 이 사랑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을까.
그날 밤, 은혜는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혼자서 와인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취기가 오르자 생각이 더 복잡해졌다. 만약 이 사람과 사귀다가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만약 이 사람이 마지막 기회인데 놓치면? 만약 시작했다가 얼마 안 가서 헤어지면? 계산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이런 계산을 하지 않았다. 그냥 좋으면 만났고, 싫으면 헤어졌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을 따져보게 되었다. 시간이 아까웠다. 마흔둘의 일 년은 스물다섯의 일 년과 달랐다. 나이가 있기에 한 번의 기회가 소중해서 그 연애의 효율을 따져서였을까. 효율. 은혜는 그 단어에 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 사랑에 효율을 따지게 되었을까. 이것은 연애인가, 투자인가.
며칠 후, 은혜는 다시 그 남자를 만났다. 전시회는 괜찮았다. 그림도 좋았고, 날씨도 좋았다. 그와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유머 감각도 있었고, 배려심도 있었다.
전시회를 나와 카페에 앉았다. 그가 커피를 주문하러 간 사이, 은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길 건너편에 젊은 연인이 보였다. 손을 잡고 웃으며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눈부셨다.
그것도 아니면 연애 시작의 끝이 아니게 되었을 때 상대방에게 상처 주기 싫어서였을까.
은혜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책임이었다. 만약 자신이 마음을 열지 못해서 이 관계가 끝난다면, 그 남자에게 미안할 것 같았다. 그는 진심으로 은혜를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 은혜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세요?"
돌아온 그가 물었다. 은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은혜 씨, 혹시 제가 너무 급하게 가는 것 같나요? 부담스러우시면 천천히 가도 돼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동시에 더 미안했다.
나는 지금 이 연애의 시작을 앞두고 있는 지금, 이 사람과 왜 연애를 시작하면 안 되는 이유를 찾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날 밤, 은혜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이 남자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키? 외모? 직업? 성격? 아니었다. 모두 괜찮았다. 문제는 은혜 자신에게 있었다.
은혜는 여전히 그 스물다섯 살의 사랑을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그 떨림, 그 설렘, 그 열정. 그것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은 정말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사랑이 꼭 필요한 걸까. 새벽 세 시, 은혜는 일어나 노트에 썼다.
"사랑에는 속도가 있다. 어떤 사람은 빨리 빠지고, 어떤 사람은 천천히 빠진다. 나는 천천히 빠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는 더 이상 빠지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을까. 두근거림 없이 시작하는 사랑도 괜찮을까. 계산하고 따지며 선택하는 사랑도 진짜 사랑일까. 나는 모르겠다. 여전히 모르겠다." 은혜는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동이 트고 있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은혜는 아직도 그 자리에, 시작도 끝도 아닌 그 어딘가에 서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그 남자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잘 주무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