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순 덩어리다.
준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핸드폰을 보니 오후 다섯 시 반.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침대 옆 탁자 위에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화면을 켰다. 부재중 전화 열두 통. 메시지 스물세 개. 모두 그녀였다.
첫 번째 메시지는 아침 여덟 시에 왔다. "일어났어?" 두 번째는 여덟 시 반. "준호 씨, 약속 안 잊었죠?" 세 번째는 아홉 시. "전화 좀 받아요." 그 다음부터는 전화만 계속 왔다. 그리고 열한 시, 마지막 메시지.
"이제 알겠어요. 미안해요, 그동안. 우리 그만해요."
준호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니, 사실은 답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더 이상했다.
그 모순으로 어떤 인연을 놓쳐버린지도 모른다.
그녀의 이름은 서연이었다. 한 달 전,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첫인상은 평범했다. 그런데 그날 카페에서 마주 앉았을 때, 서연이 웃었다. 그 웃음이 준호의 가슴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었다. 이런 설렘.
서연은 책을 좋아했고, 등산을 좋아했다. 서연과 있으면 편했다. 아니,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헤어질 때 준호는 물었다. "다음 주에도 만날 수 있을까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두 번째 만남에서 준호는 고백했다. 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매 순간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 설렘이 너무 강렬해서. 쉽게 꺼질 것 같았다.
준호는 알고 있었다. 이런 감정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스물다섯 살 때의 첫사랑이 그랬다. 너무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에 일 년도 안 되어 끝났다. 그 후로 준호는 조심했다. 너무 좋아하지 않으려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그런데 서연은 그 거리를 무너뜨렸다.
서연의 연락도 문제였다. 준호가 항상 먼저 연락했다. 서연은 답장을 했지만,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핑계는 그럴듯했다. 실제로 서연은 바빴다. 그런데 가끔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 바쁜 걸까. 아니면 일부러 거리를 두는 걸까.
알고 보니 내가 그녀의 연락을 기다린 이유가 많이 좋아해서였다.
준호는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회의 중에도, 밥 먹을 때도. 서연의 이름이 화면에 뜨면 가슴이 뛰었다. 연락이 없는 날은 지옥이었다. 준호는 불안했다. 서연이 자신만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혼자 앞서가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결심했다. 헤어지자고.
그녀의 생일이었다. 일주일 전, 서연이 물었다. "제 생일이에요. 같이 등산 갈래요? 새벽에 출발해야 해요. 여섯 시쯤 산 입구에서 만나요." 준호는 알겠다고 했다.
그녀가 이름 모를 산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날 밤, 준호는 알람을 새벽 다섯 시에 맞췄다. 잠들기 전, 생각했다. 내일 서연을 만나면 헤어지자고 말하자. 더 깊이 빠지기 전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니, 편하지는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이게 맞다고 생각했다. 준호는 그제야 잠들 수 있었다.
그녀를 만나기로 한 날 나는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일 당일,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핸드폰이 먼저 울렸다. 회사였다. 시스템 장애. 비상 대응. 준호는 잠에서 덜 깬 채 통화를 마쳤다. 새벽 다섯 시 이십 분. 노트북을 열고 원격으로 접속해 처리를 시작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느 순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평소에 잠이 없던 나에게 그날따라 잠이 쏟아졌다.
겨우 눈을 뜨니 해가 지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 반. 믿을 수 없었다. 급히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화면에 알림이 가득했다.
비상근무 사실을 말하고 서연에게 전화할 수도 있었다. 미안하다고. 사정이 있었다고. 붙잡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였을까.
머릿속이 혼잡했다. 전날 밤 헤어지자던 결심, 서연을 그리워하는 감정, 이 관계를 감당할 수 없다는 두려움. 모든 것이 뒤엉켜 있었다. 변명을 댄다 해도 다시 만나면 또 흔들릴 것이었다.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더 깊이 빠져들 것이었다. 그러다 결국 무너질 것이었다. 그 생각들이 전화기를 드는 손을 멈추게 했다. 그만 하자는 말, 그 말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붙잡지도 않았다.
돌이켜 보면, 나는 편협했다.
준호는 서연이 맞지 않아서 헤어지려 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이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도망치려 한 것이었다. 서연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서연에게 투영했다. 서연 자체를 좋아한 게 아니라, 서연이 주는 설렘을 좋아했다.
나는 항상 나의 있는 모습을 바라봐주는 사람을 원했는데 오히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준호는 늘 불평했다. 상대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런데 정작 준호는 상대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 했다. 그리고 안 되면 포기했다. 안 맞는다고. 감당할 수 없다고.
나만의 사고에 갇혀 사람을 재단하고 혼자서 속단하고 그렇게 인연을 잘라내어 버린 것이다.
어느 토요일 아침, 준호는 혼자 산에 갔다. 서연이 가자고 했던 그 산.
새벽 여섯 시, 산 입구에 도착해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에 도착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주황빛 하늘. 구름 사이로 빛이 쏟아졌다. 준호는 그제야 알았다. 서연이 왜 이 산을 좋아했는지.
눈물이 났다.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썼다.
"서연 씨. 오늘 그 산에 왔어요. 정말 아름답네요.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요. 그리고 미안해요. 당신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당신을 알려고 하지 않아서. 두려워서 도망쳤어요. 나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직도 보고 싶어요. 많이."
잠시 후 핸드폰이 울렸다. 서연이었다.
"고마워요. 그 말 듣고 싶었어요."
준호는 그 문장을 오래 읽었다. 답장을 쓰려다 멈췄다. 다시 시작하자고? 기회를 달라고?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두렵다는 것을.
답장을 쓰지 않았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오며 생각했다. 나는 모순 덩어리다. 서연을 좋아하면서도 밀어냈고, 후회하면서도 붙잡지 못하고, 그리워하면서도 연락하지 못한다.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고, 포기한 후에 후회한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한계다.
그래도 살아야 했다. 오늘도, 내일도.
준호는 걸음을 멈췄다. 뒤돌아보고 싶었다. 서연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준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서연이 없는 앞으로.
모순. 그것이 준호였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