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유수같이 흐른다.
삼월이었다. 달력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달랐다. 겨울처럼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봄처럼 너그럽지도 않았다. 어중간한 온도. 어중간한 계절. 정우는 이불 속에서 몸을 더 깊이 구겼다. 바깥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계절비였다. 겨울의 끝자락을 알리는.
그는 생각했다. 올해가 시작된 게 어제 같은데.
서른셋. 그 나이를 처음 계획했을 때는 스물여섯이었다. 첫 차를 사던 날이었다. 소형차를 고르면서 딜러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서른셋쯤이면 아이가 생기겠지. 그때는 패밀리카로 바꾸면 돼. 그 생각이 퍽 그럴듯했다. 스물여섯의 정우에게는.
그런데 서른셋의 정우는 지금도 그 소형차를 타고 있었다. 차만이 아니었다. 이직을 준비하던 서른한 살에도 비슷한 상상을 했다. 새 직장만 구하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새 환경이 새 삶을 끌어당길 거라고. 이직은 했다. 좋은 사람은 오지 않았다.
계획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럴듯하게 시작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빗소리가 커졌다.
정우는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방 안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고독은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정우는 그 말을 비틀어 생각했다. 나에게 고독은 책임이 아니라 재능에 가깝다고.
재능이라는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 문득 감정이 스며들었다. 이유 없이. 방향 없이.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유리 벽 하나가 항상 사이에 있었다. 목소리는 들렸지만 닿지 않았다. 웃음소리는 보였지만 전해지지 않았다. 대중 속의 고립. 고독이라는 글자 하나로 담기에는 그것이 가진 무게가 너무 컸다.
그랬기에 그것이 촉발한 감정은 온몸을 건드렸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정우는 눈을 감았다.
빗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창문을 두드리고, 지붕을 두드리고, 어딘가를 두드리고. 마치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것처럼. 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그런 것들에 대답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첫 차를 살 때의 그가 지금의 자신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실망할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고개를 돌릴까. 알 수 없었다. 스물여섯의 그는 지금의 자신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좁아터진 방 안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관심 속에 혼자 요란스럽게 하루를 버티는 삶을.
요란스럽게. 그 단어가 이상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데 요란스럽다는 것이. 그런데 정확했다. 안에서는 항상 소란스러웠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란이.
비가 그쳤다.
언제 그쳤는지 몰랐다. 어느 순간 빗소리가 사라져 있었다. 정우는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반들거리는 회색 천장. 아무것도 없는 천장.
그는 생각했다. 내일도 이 천장을 보겠지.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괜찮다는 말이 위로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었다. 구별하려는 노력도 오래전에 그만뒀다. 삼월의 찬바람이 다시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정우는 이불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봄은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