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지고 싶어서 쓰는 글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던 날은 꽤 충격적이었다. 나에게 말할 때는 그 사람을 당장이라도 가서 찢어 죽일 것처럼, 오늘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며 으름장을 놓고 갔던 사람이 정작 그 사람 앞에서는 말을 순화해서, 최대한 말을 돌려서 자신의 불만을 표출하는 모습을 보았다. 내 앞에서 센척할 사람도 아니고, 앞뒤가 다른 사람도 물론 아니었다. (이것은 장담한다) 후에 물어보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수는 없지만 해야 할 말은 해야겠더라고요.’라는 답이 왔다.
그 누구도 혼자 살 수는 없다. 사회생활을 해야 하고,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고,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산다면? 찝찝하고 불편한 감정들이 가득할 것만 같다. 그렇지만 해야 할 말을 제때 하지 못하면 손해 보는 일들이 다반사다. 나는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 그 사이를 조율하며 줄타기하는 중이지만, 그런 미묘한 줄타기가 답답할 때도 많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처럼 어디 산속에 들어가서 외칠 수도 없다. 나는 산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도 있거니와 요즘의 산에는 듣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내 나름의 해결책은 주관이 없는 것 같은 나의 답답함 속에서 해야 하는 말과 하고 싶은 말의 교집합을 찾아 글을 적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글을 쓰는 분들을 보면 자기 주관이 뚜렷한 분들이 많다. 나에겐 없는 그 부분이 멋져 보이고, 닮고 싶었다.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의 주관도 조금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에 첫 펜을 들었다. 분명 나를 많이 알게 되었다. 깊이 들여다보니 상황을 인지하고 행동하는 능력이 좋은 편인 유동적인 나를 마주했다. 주관이 뚜렷한 이들을 동경했기에 나 역시 그들과 비슷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순간은 참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물론 지금은 그런 부분들이 나만의 장점이 되었지만, 결핍은 늘 아쉽다.
글을 쓰는 것이 즐겁다. 화려하고, 멋진 글이 아닐지언정 글을 쓰는 그 시간이 즐겁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내 생각을 글로써 보여준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대중 속에 있어도 외롭다는 기이한 감정을 가진 나에게 글을 쓰는 시간은 온전히 나로 채워진 시간이라 전혀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짜릿함과 즐거움은 익숙해지고, 생각은 게을러졌다. 게을러진 생각은 펜을 잡을 용기마저 게으르게 만들었고 글을 잘 쓰진 못해도 좋아했기에 좋아하는 일을 등한시하는 나를 보는 것을 회피했다. 그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잠시만' '조금만'이라는 단어들이 나에게 '괜찮아'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사실 안 괜찮은데.
‘괜찮아, 조금만 더 조금만’을 되뇔수록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은 나와 더 멀어져 있었고, 뒤늦게 슬픔이 몰려왔다. 글을 쓰는 것을, 책을 읽는 것을 미루고 미룰수록 더욱더 외로웠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아도 외롭고, 술을 마셔도 외롭고, 노래방에 가서 소리를 질러도 돌아오는 에코가 슬프게 느껴졌다. 쌓여있는 책들을 보다 문득 딸아이에게 물었다. “엄마는 글 쓰는 게 좋아. 근데 또 어렵기도 해. 어쩌면 좋을까” 6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그럼 글을 쓰면 되잖아 엄마.” 당연한 말을 물어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무심하고 귀찮은 듯 돌아섰다. 역시 아이에게 배울 점은 너무 많다.
언제든 쓸 수 있지만, 그 언제는 언제가 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 언제는 지금이어야 한다. 생각에 매듭을 짓고 나자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안 괜찮아서, 괜찮아지기 위해서 글을 쓰는 이 시간, 나는 다시 한번 느꼈다. 감정을 활자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라는 것을. 핑계와 변명이 이토록 길어졌다는 것은, 미련이 철철 묻어나는 글을 썼다는 것은, 다시 잘해보고 싶어서.라고 기록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