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남자농구가 일본과 친선전을 치렀다. 귀화선수도 없이 토종 선수로만 구성된 한국대표팀은 두 번의 경기 모두 일본팀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일본 국가대표팀이 1군 선수들이 아니라고는 해도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멋진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농구는 한국이 한수 앞선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현재 FIBA 랭킹은 한국이 53위 일본이 21위다. 아시아의 맹주 역할을 했던 중국이 30위이니 일본 농구는 지난 10년간 급성장을 해서 아시아 최강이 되었다. 그 원인을 두고 여러 말들이 많지만 내가 보기에 본질적인 원인은 한국의 스포츠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에 있다. 고등학교 농구팀이 우리나라는 남녀 합쳐서 50개이고 일본은 7,700개가 넘는다. 고등학교의 농구 등록선수가 우리는 550여 명이고 일본은 14만 명 정도이다. 양국의 인구수 차이를 감안해도 그 차이는 현격 하다 못해 놀랍기까지 하다. 대학도 프로구단도 모두 차이가 크다. 이런 환경을 감안해 보면 현재의 세계 순위는 오히려 차이가 적게 느껴진다. 다른 팀스포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포츠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국가적 관심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를 해볼 예정이고 여기서는 이번 친선전에서 느낀 소감 두 가지를 정리해 본다.
5년 전 뜻하지 않게 프로농구 단장을 맡게 되면서부터 그간 벌어진 모든 국가대표 경기를 관심 있게 보아왔다. 이번 국가대표 선수들은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이 합류한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귀화 선수의 공백이 생겼고 (많은 국가들이 1명 이상의 귀화선수들을 보유한다. 농구 신선계라 불리는 미국 출신의 흑인 선수들이 많다) 주로 젊은 선수들 위주로 선발되어 불안한 점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번 경기가 특별해 보인 것은 그들의 실력이나 기량이 아니라 여태껏 보았던 모든 국가대표 경기 중에서 가장 투지와 열정이 넘치는 경기였다는 것이다. 사실 최상의 기량을 갖춘 일부 선수들은 국가대표로 뛰는 것이 마냥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은 아니다. 세계 순위가 떨어지는 종목의 국가대표는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자칫 부정적인 여론에 휩싸이기 쉽고 짧은 일정의 강한 상대와의 맞대결은 부상의 위험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기는 하지만 잠재의식 저 밑바닥에서는 어느 정도 몸을 사리게 하는 본능의 유혹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경기의 열정과 투지는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프로 농구 경기가 끝나면 게임의 MVP를 선정해서 인터뷰하는 것이 방송중계의 기본 형식이다. 현장에서 경기를 관람한 기자단이 경기가 끝나자마자 투표를 통하여 MVP를 선정한다. 당연히 우승팀에서 가장 활약이 컸던 선수가 선정된다. 경험이 많은 고참 선수들은 노련한 말솜씨로 머리를 끄덕거리고 웃음을 만들어주는 인터뷰를 멋지게 해내지만 긴장한 빛이 역력해 보이는 신인급 선수들의 불안한 눈빛과 당황스러운 말투는 보는 사람마저 긴장하게 만들기도 한다. 프로 스포츠도 팬덤에 의해서 운영되는 넓은 의미의 쇼비즈니스이니 인터뷰 자체도 뭔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주거나 웃음꽃을 만들어내면 좋은데 아무래도 경험이 적은 선수들은 긴장감 때문에 조금은 교과서 같은 이야기들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 교과서 같은 이야기들 중에 하나가 아마 "한발 더.."일 것이다. 승리의 요인을 물으면 "상대팀보다 한발 더 뛰려고 노력했다."라는 답변이 가장 흔하게 듣는 이야기다. 흔하다는 뜻은 선수들 뇌리에 가장 깊이 새겨진 이야기일 것이고 그만큼 팀 스포츠에서 강조되고 있다는 뜻이다.
국가대표 농구팀의 안준호 감독은 삼성 감독을 역임해서 가끔 경기장을 찾아왔기 때문에 안면은 있지만 그가 어떤 리더십을 갖추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경기중계중 전반이 끝난 브레이크 타임에 그의 인터뷰가 소개되는데 거기서도 한발 더 뛰는 농구라는 말이 나온다. 식상해 보이지만 개인적으로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 야구경기가 후반전을 향해 치닫고 있다. 중위권 순위싸움이 치열하다. 야구팬들은 작년 프로야구 정규시즌의 순위는 잘 알지만 정작 그 승률을 잘 아는 경우는 드물다. 가끔 특강을 하면서 승률에 대한 질문을 하는데 정답을 맞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작년 프로야구에서 10번을 싸워서 6번 이기고 4번 진 팀은 몇 위를 했는가?" "4번 이기고 6번 진 팀은 몇 위를 했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정답을 얘기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1위를 한 기아는 정확히 6할 1푼 3리(0.613)의 승률이었고 꼴찌를 한 키움은 4할 3리(0.403)의 승률을 따냈다. 6번 이긴 팀은 1위를, 4번 이긴 팀은 꼴찌 10위를 했던 것이다. 1위와 10위의 차이는 매우 커 보이지만 프로세상에서의 실력의 차이는 그렇게 크게 벌어지지 않는다. 프로 세상은 한 끗 차이로 승패가 갈리고 메달의 색갈이 달라지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발 더"라는 말은 단순하고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쉽고 적확한 말을 찾기는 힘들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모든 프로의 세계에서는 작은 차이가 글로벌 세상을 주무르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위기를 맞기도 한다. 하루하루가 모여서 인생이 되듯이 매일 한 발자국씩 남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 차이는 시간의 힘으로 눈덩이처럼 커지게 된다.
이번 국가대표 경기에서 단연 눈에 띄는 선수는 미국 대학과 호주 리그에서 뛰고 있는 여준석 선수와 이현중 선수이다. 중고교 시절부터 특별함을 보여주었던 두 선수는 해외무대를 목표로 미국 대학 진학을 선택한 선수들이다. 이번 국가대표에 선발된 두 선수는 아니나 다를까 눈에 띄는 활약상을 보여주었는데.. 사실 두 선수가 해외무대를 선택했을 때 우려 섞인 목소리들이 많았다. 그 이전에도 해외무대를 도전한 선수들이 있었지만 모두 해외의 높은 장벽만을 절감했을 뿐이고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전성기 때 시간의 손실만을 보았다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출전의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여 기량을 향상하기는커녕 경기감각이 무뎌져서 실력이 퇴보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뛰면 수억 원대의 연봉과 최고의 인기를 누릴 것이 뻔한데 국내에서의 압도적인 기량을 과신하여 함부로 해외 무대를 덤비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한다. 일부분 동의하지만 내 입장은 그런 도전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를 조명하는 다큐를 보았다. 선수 인터뷰에서 (이영표 선수였을 것이다) 당시 한국선수들은 체격이 월등히 큰 유럽의 선수들이나 발기술이 현란한 남미의 선수들을 만나면 경기시작 전부터 저절로 주눅이 들었다고 한다. 실력의 격차도 컸지만 상대할 기회도 적었으므로 심적인 부담으로 평소의 기량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많은 평가전을 치르면서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붙었고 그 자신감과 투지를 바탕으로 실력차를 극복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세계 무대에서 여러 선수들이 활약하는 축구는 이제 누구와 붙어도 경기결과와 상관없이 적어도 치열하게 치고받는 싸움을 해낸다.
오늘날의 삼성의 반도체나 현대차도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모두 무모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계 시장과의 격차가 워낙 커서 그런 상대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것은 어리석고 낭패를 볼 것이 뻔하다는 걱정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삼성이나 현대가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그 무모함이 낳은 결과이다. 크고 강한 상대와 겨루는 것은 승리는 장담할 수 없어도 큰 성장은 담보할 수 있다. 큰 세상에서 더 강한 상대와 겨루는 것은 - 비록 실패할지라도 - 커다란 교훈과 값비싼 경험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가장 좋은 보약이 되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낸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개척자, 선구자가 되어 그가 속한 세상의 수준도 한 차원 오르게 한다. 무모한 도전의 실패담은 쉽게 포기하고 도망친 자들의 이야기들이다. 큰 세상에 도전하지 않으면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다. 무모한 도전이란 것은 없다. 그것은 담대하고 용감한 도전인 것이다. 큰 세상에 도전하는 자, 그들에게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