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 디올 전시 관람 단상
좋아하는 몇몇 후배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전시장을 찾는다. 이 비밀결사대의 명칭은 "비전프로". 회사에서 소속되었던 조직명칭(BE:Brand Experience)과 전시회, 회사 직원들의 호칭(프로)을 결합한 얼렁뚱땅 네이밍이다(설마 애플이 저작권 시비를 걸진 않겠지). 명칭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조직원도 있지만 이런 건 밀어붙여서 자꾸 불러대면 정리가 되는 법이다^^;;
이번 달 찾은 전시회는 DDP에서 진행하는 크리스챤 디올의 브랜드 전시회. 정확한 전시명은 "Christian Dior: Designer of Dreams(크리스챤 디올: 디자이너 오브 드림스)"라고 소개되어 있다. 파리에서 시작해서 런던, 상하이, 청두, 뉴욕, 도하, 도쿄, 리야드를 거쳐 서울에 왔다. 명품들의 큰 시장을 찾아다니는 전시회다. 루이뷔통, 샤넬, 까르띠에 등도 미술관 등을 임대해서 이미 유사한 전시를 개최했었다. 2009년에는 프라다가 경희궁에 트랜스포머라는 파빌리온을 운영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이제 명품 브랜드 전시는 서울 여러 곳에서 마치 해외 미술품 전시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광고와 달리 오감이 느껴지는 특별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브랜드 전시는 명품의 구매욕구인 욕망과 환상을 심어주기에 딱 좋아서 명품브랜드들이 선호하는 고도의 마케팅 기법이 되었다. 직장에서 보낸 대부분의 시간도 이런 일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것이었으니 그 음흉한(?) 의도가 제법 이해가 된다. 출구에 써붙인 디자인과 제작업체들의 낯익은 이름들은 지난 세월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치를 좋아하지 않고 그만한 재력도 없지만 사실 사치품을 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따지고 보면 역사적인 예술품들은 모두 그 시절의 사치품인 것이 대부분이다.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차별적인 세상, 사치와 허영이라는 불편함도 느껴지지만 그런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화려함과 아름다움의 세상을 가볍게 감상해 보기로 한다. 관람을 마치고 떠오르는 단상 두 가지를 정리해 둔다.
욕망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 욕망은 사회적 불평등과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반면에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 본능이 외화 되고 과도해지면 사치가 된다. 사치는 때로는 아름다움과 화려함의 결정체를 만들어낸다. 더 특별한 것을 가지고 싶은 구매자의 욕망과 더 화려한 것을 만들어내려는 창작자의 욕망이 결합하여 명품들이 탄생한다.
전시장은 사치스러움의 결정체이다. 한 땀 한 땀 수를 넣고 액세서리를 덧붙인 드레스와 손가방의 디테일은 비현실적인 미학을 보여준다. 공간은 굽이치며 좁혔다 넓히면서 발견의 기쁨을 더해주고 조명은 화려함에 빛을 더한다. 잘 기획되고 정제된 화려함이 보는 이의 시선을 즐겁게 한다. 패션과 공간, 빛의 장인들이 힘을 합쳐서 관람객들의 눈을 키우고 둥실둥실 떠다니게 만든다. 관능적이고 욕망에 가득한 공간은 화려함의 극치를 향해서 달려 나간다. 과시와 사치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그 화려함에 밀려서 더 이상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전시를 한 지가 꽤 되었고, 평일 오전 11시 오픈 시간에 맞춰서 갔는데도 사람들이 꽤 많다. 관람객들을 그룹으로 나누어서 시차를 두고 입장을 시킨다. 20분 정도 줄을 서서 대기를 하는데 줄에 서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성들이다. 남성, 특히 나와 같은 중장년의 남자는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패션 명품이라는 관심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어떤 전시회를 가도 여성 관객이 눈에 띄게 훨씬 더 많다. 미국에서도 전시장 관객은 여성과 남성 비율이 6 대 4 정도라는데, 한국에서는 7 대 3, 아니 8 대 2 정도로 느껴진다. 중장년층으로 가면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전시나 음악 같은 감성적인 영역에 여성들이 관심을 더 많이 기울이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중장년 남자들은 이런 곳에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해서일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경험이 적으면 감흥이 적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직업적인 이유로 다양한 전시회를 경험하였고(해야만 했고) 여러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한 경험이 있어서 전시장을 찾으면 특별한 감흥을 느끼게 된다. 뭔가 잘난 듯이 떠드는 나도 음악회에 가면 숙맥이 된다. 첫곡은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차이를 분별하지 못해서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듯한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시간을 일터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온 중장년 남성들이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고 지난 시대의 작은 비애처럼 느껴진다.
내 담당은 아니었지만 내가 일하던 조직에서 20여 년 전에 전시회 사업을 한 적이 있었다. 해외에서 도입한 전시도, 국내에서 기획한 전시도 모두 큰 손해를 입었다. 당시만 해도 입장료는 1만 원 이상을 넘기기 어려웠다. 비싼 입장료는 가격저항으로 관객을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 통설이었고 그런 이유로 전시사업에서 이익을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은 가격을 불문하고 좋은 전시회나 음악회는 오픈런으로 순식간에 매진이 된다. 그만큼 문화적인 수준이 올랐고 풍족한 사회가 되었다. 국력과 국격이 오르면서 해외의 좋은 전시 프로그램들이 한국의 시장을 흔쾌히 찾아든다. 이런저런 이유로 좋은 전시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중장년 남성들도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유시간에 전시장을 찾아보길 권한다. 다니다 보면 점점 특별한 감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 달에 한두 번 방문하는 것은 비용도 큰 부담이 아니고 생각보다 걸음수도 많아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성비가 좋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산과 들을 찾는 것도 좋은 활동이지만 거기에 전시장을 하나 더 추가하면 시간의 메뉴가 더욱 풍성해진다. 세상에 늦은 것은 없다.